박승민(서초입시학원)
학생 시절 대책없는 타향살이에 지치고 배고플 때쯤이면 상처입은 들짐승이 막판에는 제 굴속을 기어들듯 중앙선 밤기차를 타고 조용히 밤안개처럼 고향땅에 스며들었다.
내게 고향은 배부를 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용지물이었지만 세상과의 싸움에 패하고 버림받을 때면 또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조강지처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저변 밑바닥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치던 "고향 영주"라는 그 단어도 막상 영주역에 내리는 그 순간 다시 상경열차를 타고 되돌아 가고 싶은 어떤 역정(逆情)으로 다시 되돌아와 내 가슴에 박히곤 했다.
집에 가 봐야 오두막처럼 늙어가는 두 부모와 그렇고 그런 친구들과 이제는 추억이랄 것도 못되는 또 다른 유년의 어떤 상처와 이루지 못한 꿈, 열망, 사랑 그런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저 5월의 산벗꽃보다 더 난만히 내 마음속에 흩뿌려지며 한세상 사는 것의 어려움을 그 막막함을 가슴에 가슴을 보태며 몸으로 아프게 보여줄 뿐이었다.
아는가?
쓸쓸하게 늙어가는 부모와 그 부모를 더욱 쓸쓸하게 감싸며 어둠에 젖어있는 빛 바랜 기와지붕과 겨우겨우 중학교만 달랑 마치고 면서기가 되고 직물공장 직공이 되고 생사공장 여공이 된, 그래서 먼 발치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실실 옆골목으로 피해가는 동창들의 그 허기진 뒷모습을. 그리고 그 풍경은 마치 입술이 타들어가듯 언제나 흐를 듯 말 듯 건기의 습습한 도랑물로 간신히 간신히 자신의 존재의 밑바닥까지도 치욕스럽게 보여주던 저 서천변의 그 빈한한 물줄기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번 맛본 딴 도시의 휘황찬란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이 경상북도 북부 산간지방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농촌경제가 전부였다면 이 도시의 저 반대 편에는 넘쳐나는 돈과 밥과 기회를 찾아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오는 촌놈들의 행렬과 자고 일어나면 부자가 되고 하룻밤 더 자고 일어나면 갑부가 되고 그 졸부 아들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촌놈과 서울 놈 사이의 그 뛰어 넘을 수 없는 그 출신성분의 국경을. 그리고 그것이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램 수를 재는 이 세상 유일의 인간척도법이였다는 것을.
서울은 그렇게 내게 넘을 수 없는 첫사랑같은 것이었고 사람은 폐허가 된다.
그때의 그 엿같은 기분을 두고 시인 김수영은 비애(悲哀)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알렉스 헤일리 원작의 "뿌리" (ROOT)에 나오는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린 흑인 주인공은 자신의 까만 피부색을 백인처럼 희게 만들기 위해 이태리 타올로 살거죽을 벅벅 죽도록 문질렀을지도 모른다. 이때 "살을 민다는 행위"는 카튼필드(목화밭)에 기반을 둔 자신의 비극적 출신성분을 지운다는 엄숙한 제의의식(祭儀儀式)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팔팔하던 시절도 양수리 그 말못할 깊디 깊은 강물 속으로 다 흘러가 버리고 어떻게 밀리고 또 떠밀려서 나 또한 별 수 없이 이렇게 조용히 고향 땅에 스며들어와 석쇠판의 오징어 뒷다리처럼 살고 있다.
경북 영주시 영주 2동 2통 1반 65번지.
이젠 내 원적지가 된 그곳은 더 이상 내게 그리움의 대상도 버려야할 상처도 아닌 채 하루하루 세금 방어하기에도 급급하며 찌부러진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38년 전과 변한 것이 있다면 38년의 세월을 더 살아 버린 내 청춘과 그만큼의 가속도로 더 늙어 버린,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짧은 내 부모와 그 집을 둘러 싸고 있는 낡은 담장, 칠 벗겨진 대문, 무너진 서까래 따위들......
그리고 그것을 한숨처럼 바라보고 조용히 돌아서는 이미 반환점을 돌아버린 한 쓸쓸한 인생이 있을 뿐.
그리고 지금 그 인생처럼 늙어가는 한 도시가 봄비에 쌓여 조용히 젖어가고 있다.
사람처럼 이 도시도 지금 너무 늙고 병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먼 훗날 그것도 유산이랍시고 우리는 우리 아들 딸들에게 뻔뻔스럽게 물려줘야할지도 모른다.
(박 승 민.서초입시학원장)
[시민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