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출(영주고 교사)
…일제의 시민 통치에 항거하는 신문은 모두 폐간되었으나, 3·1운동 이후에는 이른바 문화통치에 의해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발행이 허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족지는 일제의 검열에 의해… (고등학교 국사 하권 172쪽 중간)
민족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에 앞장섰다. 물산 장려운동을 홍보하고 모금운동에 앞장섰으며… (중학교 국사 하권 145쪽 아래쪽)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 상임대표인 동국대 교수 김동민 씨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반대 운동에 앞서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 왜곡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친일행각을 벌이며 반민족적인 행동을 저질러 온 것은 엄연한 사실임이 이미 밝혀졌는데도 교과서에는 이들 신문이 민족지로 표기돼있고, 실제로 일제에 항거하다 폐간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이들 신문이 저지른 반민족적 행위를 올바르게 기록해 후세에 알려야 한다. 이는 친일 잔재를 청산한다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한겨레신문의 기획 연재 「심층해부 언론권력」은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제호를 끌어내리고 그 위에 일장기를 실은 조선일보 1940년 1월1일 치 1면 사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친일보도를 했다는 <조선일보 designtimesp=13545>의 오랜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의 이런 보도 태도에 대해 '여당지'니 '친여지'니 하고 매도하고 있는 조·중·동은 가히 언론권력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왜곡·편파 보도를 일삼는 족벌언론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있다.
이러한 일련의 태도를 한겨레신문에서는 '조폭언론'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있다. 이 용어에 대해 족벌언론은 딴죽을 걸면서 언론사 세무조사가 언론 탄압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 문제에 대해 조선일보 「홍사중 문화마당」에서 이 필자는 '얼굴 없는 폭력'이라는 제목으로 정말 어이없는 글을 썼다. 그 글에 대해 4월 27일자 한겨레신문 「길라잡이」에서 김규항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며칠 전 <조선일보 designtimesp=13554>(빌어먹을, 정말이지 이 신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만)에 실린 홍사중씨의 칼럼이 그런 경우다. 내용은 이렇다. 홍사중은 박정희 시절 가요에 금지조처가 많은 걸 보고 '황성옛터'는 왜 금지하지 않느냐는 글을 썼다.(황성옛터는 박정희의 애창곡이었다.)
홍 씨는 남산에 잡혀가 "공포 교육"을 받고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왔다. "그런지 10년이 지나고 또 몇 해가 지났다. 돌이켜 볼 때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의 상황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 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후에 그곳의 '아주 높은 분'으로부터 저녁 대접을 받았다. 너털웃음을 짓던 그에게는 적어도 꾸밈만은 없어 보였다.
김규항 씨는 이렇게 글을 맺었다.
폭력에 미학은 없다. 폭력의 미학이란 폭력을 감상하거나 가상 체험할 뿐인 유한계급의 말장난일 뿐,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그 세기에 비례하는 구체적인 고통일 뿐이다.
아니할 말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같은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는" 폭력을 당했어도, 홍씨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추정할 것 없이 홍씨에게 묻도록 하자. "선생, 그 얘기 최우혁이(1987년, 22살의 나이로 강제 징집되어 부대 쓰레기장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됨.)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할 수 있습니까?"
필자는 아마 홍씨가 말한 '얼굴 없는 폭력'이란 여론(與論)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생각을 해 보았다.
김우출(영주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