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민(서초학원장)
농사일이라고는 대학 때 3박4일로 농활 갔다 온 것이 경력의 전부인 내가 봄, 가을로 몇 차례씩 불려나가 하루 품팔이를 살다가 올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일도 한 반나절쯤 하면 입에서 단내가 헉헉 나고 귀가 멍멍하며 혓바닥이 축축 늘어져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 된다. 그러면 아무 데나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하는 한 생각, "나는 때려죽여도 농사는 안 짓겠다! 이렇게 봉 빠지게 일해서 일년에 얼마를 버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편리하게도 통계청에서 이 의문을 해결해줄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농민들이 휴일, 공휴일도 없이 일한 대가로 년 2천3백만원쯤을 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퇴직급, 상여금도 없고 그 흔한 시간 외 수당은 물론 산재보험, 근로기준법도 적용 대상이 아니다.
박찬호가 공 6개를 던지는 액수에도 못미치는 이 처참한 성적표를 받기 위해 그들은 일 년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콧구멍이 땅바닥에 닿도록 일하는 것이다.
때문에 농가 1가구당 부채가 이미 2천만원을 넘어섰고 부채 증가율이 10년새 4.3배로 증가하는데 반해 평균소득은 2배 상승한다고 해서 하등 놀랄 일이 아니며 결국 그들은 아무리 일을 해도 부채가 2배씩 늘어나는 이상한 농사를 10년째 계속해서 짓고 있다고 해도 더 더욱 놀랄 일은 아니다. 농촌의 어려움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WTO체제 출범" "UR협정" "구제역" "광우병"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한.중마늘 협상" "100년 만의 왕가뭄" "양파 생산과잉" "돼지파동 우려" 등등 아무 데서나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는 이 용어들은 지금 우리 농촌을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가는 구조적 "덫들"인 것이다.
여기에 자식들의 교육문제, 농촌 총각들의 결혼문제, 농촌인구의 고령화 등이 겹치면서 지금 농촌 공동체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또 기회만 주어지면 보다 더 안전하고 편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전업하겠다는 농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1차적 책임은 역시 농업경시 정책을 일관되게 펴온 역대 정권들의 누적된 실정(失政)에 있다.
순수 농업 총생산액이 국민 총생산액의 5%미만을 차지하고 농업인구가 총인구의 9%, 농림수산업종사자가 전국경제활동인구의 12% 미만을 차지하는 이 보잘 것 없는 유권자에게 어느 누가 큰 관심과 배려를 하겠는가?
특히 7~80년대 수출을 통한 고도 경제성장을 주 목표로 삼아온 역대 정권들은 (그 시발점은 역시 박정희이다) 정책적 필요에 의해서 산업 우선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여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농촌 노동력에서 끌어옴으로써 급격한 농촌경제의 몰락을 방조 내지 조장했다.( 7~80년대 얼마나 많은 이농현상이 벌어졌는가?)
이렇게 팽창한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시달리게 하는 대신 저곡가 정책을 정책적 기조로 삼음으로써 한편으로는 불만에 가득찬 노동자들의 입을 틀어막고 또 한편으로는 농촌경제의 붕괴를 통한 산업노동력 확보를 용이하게 해왔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이나마 독점재벌들이 떵떵거리며 큰소리 빵빵 치는 그 밑바탕에는 역시 농촌경제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것으로 상황이 종결된 것일까? 부족한 쌀은 좀 비싸더라도 캘리포니아산 "캘로그"나 버마산 "안남미"로 대신하고 밑반찬은 마늘, 고추, 양파, 대파, 쪽파까지도 백화점식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수입물로 대체하고 그래도 안되면 이참에 아예 식습관을 싹 바꿔서 밀가루로 만든 지팡이처럼 생긴 "바게트"를 아침마다 부엌칼로 듬성듬성 썰어서 우유 한 잔으로 때우면 되지 않을까? 혹시 초등학교 4학년 정도나 할 이런 상상을 농촌 정책 담당자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21세기는 그 어떤 국가 안보보다도 식량안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98년 냉해가 발생했을 때 식량부족사태가 일어나자 정부는 부랴부랴 미국으로부터 시세보다도 3배나 비싼 값에 쌀을 구입한 적이 있으며 IMF 사태가 그 정도로 마무리된 것도 쌀은 수입하지 않아도 된 덕분이라는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쌀 생산량이 인구 증가를 못 따라잡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2025년이 되면 아시아 인구가 지금보다 12억명 이상이 늘고 쌀 소비량이 최고 31%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곡물 자급도 30%, 식량자급도 60% 미만에 있다. 그리고 한국농업의 기반이 완전히 붕괴할 때쯤이면 미국의 메이저급 곡물수출상들은 슬슬 농산물 값을 올려 받기 시작할 것이다. 자! 이래도 우리는 농촌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대로 간다면 한 10년 뒤쯤이면 뱃속을 출처불명의 다국적 원산지로 꽉 채운 채 만성소화불량환자처럼 낑낑거리며 화장실에서 국적불명의 외제 배설물을 방출하느라 죽을 똥을 싸고나 있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비극적 상황만은 피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어느 미국 농민의 약간은 밉살스러운 실토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만약 국가보조금과 각종 농작물 보험제도가 없었다면 우리도 아마 파산했을 겁니다"
<박승민.서초학원장 designtimesp=23528>
[시민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