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출(영주고 교사)
어쩌면 영웅이 만들어지는 사회보다 만들어진 영웅들이 일그러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개인의 가슴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었던 삶의 모델이 허물어지면 살아가야할 인생에 대한 방향성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매우 슬픈 일이다.
필자의 꿈은 소설가였다. 군에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이문열의 중편 '새하곡(塞下曲)'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신동아'에 실렸는데, 그것을 읽고 절망에 빠진 적이 있다. 군대에서의 체험을 그 소설 이상으로 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대 후에도 그의 '들소' , '사람의 아들' , '필론의 돼지' , 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그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은 최상규의 '타조의 꿈' 이나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이상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실례가 될 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심지어 '익명의 섬'이나 '레테의 연가' 같은 대중성 짙은 작품마저 사견을 전제로 황석영의 '섬섬옥수'나 '삼포 가는 길'에 필적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요즈음, 내 가슴속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6공을 거치면서 국민주로 탄생한 한겨레신문에 희망을 건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 이상의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필자의 희망 이문열은 저 김지하가 '젊은이들이여,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 라는 글을 실었을 때보다 더욱 역사의식이 결여된 글('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 와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흔히 말하는 신문 빅3는 5, 6공 때 신용비어천가를 지으면서 숨죽이고 어용으로만 살아남았던 언론권력이 아니었던가. 더 이상의 왜곡·과장 보도를 참을 수 없어서 일어난 시민운동을 정부나 정권의 홍위병이라고 한 사실에 대해 기가 막힌다.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사주의 탈세 사실을 들추어낸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동안 탄탄하게 다져진 기득권을 잃기 싫어서 사주 측의 입장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칼럼이나 시론(조용중의 '신문 욕보이기' , 이민웅의 '언론이여 할말은 해라' , 여영무의 '벼랑 끝에 몰린 언론자유' ,'언론파동은 정치 드라마' 유석춘의 '악령들의 문화혁명' 등, 많은 지식인들이 조폭 언론의 사주 측에 줄을 섰다.)으로 도배를 한 신문도 과연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토마스 제퍼슨의 경구를 함부로 인용하지 마라. 이 말에서는 가장 준법적이고 가장 공익적인 신문을 말한다. 섣불리 착각하지 말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올 김용옥의 박학다식한 카리스마에 오금을 펼 수 없어서 그의 신자가 되었던 필자는 이경숙의 '노자를 웃긴 남자'를 보고 왜 후기신(後其身)해야 하는가를 알았다.
이렇게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활짝 열린 사회에서 언론 탄압이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다만 자본의 위력에 셀러리맨이 되고 만 기자들을 볼 때 서글픔을 느낄 뿐이다.
추의원의 취중실언만 크게 보도한 신문들은 그가 흘린 눈물의 진정을 그렇게 외면할 수밖에 없는가? 지각 있는 이 땅의 기자들이여! 부디 양심적인 독자들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 다오.
한때 필자의 우상이었던 이문열은 운이 좋아서 일제 시대에 태어나는 걸 면했다고 했다. 그리고 해방 50년이 지나 지금 젊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친일을 욕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한 그의 생각은 그만큼 그 어려운 시대에 친일하지 않고 살아남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말자.
보수 기득권층에 줄을 선 지식인들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펴는 주장을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겸허하게 귀 기울여 주기 바란다.
<김우출.영주고교사 designtimesp=13350>
[시민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