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아무도 찾지않는 방법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찾지 않을까요”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추진한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IMF 영향, 어음 부도로 사업 중단의 우여곡절

35년째 전통 방식인 ‘북직기’ 이용해 인견 생산

창성직물 김창섭 대표
창성직물 김창섭 대표

“80년대까지만 해도 인견 붐이 일어 20여 개의 공장이 북직기 방식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저희 창성직물만 북직기를 고집하고 있어요. 인력 수급이 어렵고 원단 비용이 많이 들어 마진이 약하기 때문에 북직기 방식의 공장들이 거의 다 없어졌지요”

풍기읍 서부리에 소재한 창성직물 김창섭(71) 대표는 단산면에서 태어난 후 세 살 무렵 가족과 함께 풍기로 이사를 나왔다. 인견 기계를 수리하는 엔지니어로 20여 년 이상 종사하다가 1988년에 인견 사업을 시작한 후 기계고속화를 통해 인견 생산을 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35년째 전통방식인 ‘북직기’를 이용해 인견을 생산하고 있다.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

김 대표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동양대 인근 한림촌에 정착한 후 밭을 사서 쌀농사를 짓다가 이후에는 적게나마 인삼 농사를 지으면서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조부나 부모님은 농사만 짓는 순박한 분들이었고 매년 1년을 먹을 정도가 안돼 빌려다 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다.

소 한 마리도 키웠는데 학교를 갔다 오면 소먹이를 지게에 한 짐 베어다가 놔야 했으며, 땔감을 구하기 위해 소백산을 많이 올랐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다닐 수 없었다. 김 대표가 공장을 시작하면서 어른들은 농사를 접었다.

칠남매 중 둘째인 그는 맏아들로 막내 동생과 18년 차이가 난다. 칠남매 중에 막내 동생만 풍기에 살면서 제유소를 하고 있고 나머지는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 셋째 동생은 유일하게 같은 업에 종사하며 서울에서 인견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으나 현재는 돌복 의류을 만들고 있다.

1980년, 스물여덟살에 결혼한 김 대표는 중매를 통해 봉화 춘양면이 고향인 아내를 만났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창량리역에 도착해 시계탑 앞에서 만났던 장거리 연애의 아련한 추억도 떠올렸다.

결혼생활 내내 부모님과 동생들이 함께 한집에 살아 대가족들을 챙겨야 했던 아내가 특히 고생이 많았다고 고마워했다. 그래도 모가 나지 않아 원만한 성격이었던 아내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래의 형제들을 자식처럼 챙기고 남매도 낳아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키웠다.

'창성직물' 인견 원단
인견 원단

풍기인견과 만나다

김 대표는 17살에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처음 인견을 접했다. 당시 동력직기는 모터 하나로 전체 직기를 돌리는 형태여서 모터에 전원을 넣으면 전체가 다 돌아가게 돼 있었다고 했다. 실의 공정 과정도 지금은 실이 가공돼 나오지만, 그때는 실에 풀을 먹이지 않고 나와 여러 공정 과정을 거쳐야 했다. 원사를 가져오면 풀을 먹이고 말려서 다시 둥그런 깡통에 감아 정경을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인견을 접하고 38세에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까지 그는 21년 동안 다른 공장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당시에는 기계 2대를 한사람이 담당했기 때문에 30대쯤 되면 직수만 15명이 됐고, 이외에도 일하는 사람이 10명 정도여서 30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이 공장에서 함께 일했다고 한다.

“기계가 계속 돌아가다 망가지면 그걸 고치고 새로 부속을 사다 넣기도 하고, 철공소에 가서 재생해 가지고 와서 교체하는 기사로 일했습니다. 이것도 기술이니 처음에는 심부름을 하면서 선임에게 3~4년 배운 후 좋은 일자리를 찾아가고 그랬죠”

김 대표처럼 공장을 다니다 직접 공장을 운영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어렵게 시작해 운영이 어려워지다 보니 문을 닫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처음에는 원사를 임가공으로 받아 짜주면서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세를 얻어 운영하는 공장이 가동하지 못하고 직원들의 임금을 주지 못하면서 운영을 멈추게 됐다고 했다.

70~80년대 풍기인견 사업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할 당시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7시까지 12시간을 일했다는 김 대표는 공장에서 2교대로 24시간을 기계를 돌려야 했으며 교대 직원이 아프면 다시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당시에 풍기에서 제일 큰 ‘풍덕직물’에만 기숙사가 있었고 대부분의 공장엔 기숙사가 없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취를 했다고 한다. 풍기지역 인견 공장들은 대부분 말일쯤 월급을 주는데 그날은 풍기읍내가 떠들썩했다고 회고했다.

“극장이 두 군데나 되죠. 말일에 월급을 받으면, 아침에 나가면서도 월급 받을 수도 있고, 저녁에 나가면서도 받을 수 있는데, 공장에서 나오면 술을 먹는 사람들은 나가서 술도 같이 마시고, 술을 안 먹는 사람들은 극장도 가고, 서로 돈이 좀 있으니까, 그때는 그랬죠”

김 대표가 처음 공장에서 일하던 1970년 전후쯤에는 월급이 ‘4천500원’이었고 기사로 일하면서 십몇만 원까지 받다가 30만원 가까이 받을 때는 직장을 나와 공장을 차렸다.

내 사업을 시작하다

성실하게 일을 잘해 좋은 조건의 스카웃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직장을 옮기지 않았던 김 대표는 21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사업을 해볼 마음을 먹었다. 월급을 타면 꼬박꼬박 넣었던 적금이 만기가 되었고 마침 형편에 맞는 중고기계도 나와 기계를 샀다. 기계 밖에 못사니 부모님과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아 550평의 부지에 공장을 짓고 중고기계 8대로 인견 공장을 어렵게 시작했다.

운영하던 중에는 직수들 월급에,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위기도 있었다. 그때 장인어른이 건넨 600만원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이후 조금씩 인직을 짜면서 기계를 늘려 원단만 생산하는 기계만 32대, 가장 많은 때는 40대가 넘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창성직물에서는 자카드, 무늬가 안 나오고 편직으로 되는 제품으로 나오는 도비, 두 가지로 나오고 있다. 30야드씩 롤로 말아 동대문시장과 광장시장으로 나가고 전주, 남원, 부산 쪽에 조금씩 나가기도 한다.

이른 봄이면 옷을 만들기 때문에 보통 1만 야드, 많이 나갈 때는 2만 야드가 한 번에 나가고 여름이 다가오면 만들었던 제품이 모두 나가 재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3~11월 정도 공장을 가동하는 창성직물에서는 한 달에 많이 제직할 때는 4~5만 야드 가까이 제작하고 있다.

첫 시련, 부도를 맞다

그렇게 시작한 공장은 김 대표의 노력으로 잘 운영되다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임가공을 했는데 어음을 주면 3달이 지나야 돈이 들어와요. 당장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거래하는 회사가 어려우니 부도를 내요. 월급도 그렇지만 부품이라든가 이런 걸 외상으로 사오고 결제를 해야 하는데 진짜 난감했어요”

당시 원단이 좀 있어 지인과 원단을 싣고 대전에 갔으나 부도난 공장의 원단인 것을 알고 기존 가격의 절반을 제시했고 어쩔 수 없이 팔아 겨우 월급을 줄 수 있었다. 1995년 IMF의 영향과 어음 부도로 1억 원 정도의 피해를 보면서 사업을 중단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진짜 애 먹었어요. 말도 못해요. 지금 다 청산이 되고 내가 웃고 이러지만 그때 그 당시에는 내가 사실은 죽고 싶더라니까요. 몇 번 죽으려고 그랬었어요”

김 대표는 “마침 운이 좋았는지 경기가 좋아지면서 15년 정도 걸려 빚을 모두 청산했다”며 “믿고 도와준 가족과 직원, 이웃들이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 많던 풍기지역의 인견공장이 많이 없어진 시기도 IMF때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풍기읍내에는 공장이 170~180곳 가까이 됐고 창성직물 주변에도 10여 곳이 남아 있었지만 농공단지나 산업단지로 옮겨가거나 불황으로 폐업이 이어지면서 시가지에서 공장을 가동하는 곳은 창성직물 한곳이라고 했다.

창성직물의 전성기와 유지비결

김 대표는 2000년초 월매출 2천만원을 넘겼을 때가 창성직물의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지금은 욕심 없이 유지하고 있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때까지 이어가다 인수받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물려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성실하게 살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나도 속지 않고, 나도 남을 절대로 속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오공환 생활기록가와 함께
오공환 생활기록가와 함께

‘북직기’를 고집하는 이유

최신 직조기계와 비교해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북직기는 꾸리를 감아서 왔다갔다 하면서 실을 풀어 주는데 에어직기처럼 실을 날리면 끊어주지 않기 때문에 마감이 깔끔하고 밀도가 높아 도톰하다고 설명했다. 마감이 깔끔하고 도톰하기 때문에 이 원단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최신기계에 비해 부품가격이 저렴한데다 직조 과정에서 하자를 바로바로 잡아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것도 북직기의 장점이다.

“그전에는 북직기가 많았죠. 지금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을 거예요. 아마 그전에는 이 섬유 기계가 강화도에도 있었고, 대전에 있었고, 대구는 원체 많았고, 그런데 지금은 이 북직기가 거의 다 없어졌어요”

현재 풍기에서는 창성직물에서만 북직기를 가동하고 있다. 경기가 없으니 다른 곳에서는 가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아주 고급제품은 북직기에서 나온다”면서 “경쟁력은 떨어지지만 이걸 찾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에 맞춰 응용해 가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정직과 신뢰로 살아오다

김 대표는 풍기인견의 발전을 위해 인견판매시장을 집단화했으면 한다고 바랐다. 소비자들이 풍기에 왔을 때 풍기인견이 집단화가 돼 있으면 소비자들도 좋고 제품을 파는 업체들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 김 대표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물품대금을 많이 못 받아봤지만, 남에게 줄 것을 한 푼도 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싫은 소리 한 적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앞으로는 아내와 함께 건강하고 아이들이 원만하게 잘 되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면담자: 생활기록가 오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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