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감성의 순수 풍기인견 100% 고집하다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헌 베틀 사서 천 짜는 기술 배워 공장 시작

48년여 동안 운영, 200가지 넘는 품목 생산

“아버지의 도움없이 아버지보다 더 많은 땅을 사고, 돈을 벌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삼화산업 마루미 풍기인견백화점 유태순(71) 대표는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이주해온 부모님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풍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니며 풍기인견 포목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도와 고등학교 때부터 동대문시장을 드나들며 일을 돕다 고향으로 내려와 인견 직물공장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풍기와 서울에서의 생활

유 대표는 풍기읍 성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북도 박천군, 어머니는 평안남도 개천군으로 유 대표는 첫 번째 구술과정에서 지난날 이산가족 찾기를 위해 작은아버지가 16절지 종이에 이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이름과 땅 등의 내용을 써놨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사용하지 않게 됐던 귀한 자료를 꺼내 보였다.

그 안에는 고향 주소와 맨 위의 형과 누이의 이름, 고모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고 통일되면 이 동네를 찾아가고 대대로 내려온 문중 땅도 많으니 다른 데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피난을 온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부모님은 유 대표를 비롯해 3명의 자녀를 낳았다. 맏아들이었던 유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명절 때면 가끔씩 정감록 십승지 중 제1승지가 풍기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북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갈 곳이 없던 중 십승지인 풍기를 찾아와 전쟁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고 했다.

부모님은 유 대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열심히 생활해 자녀들이 먹는데는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그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지 않아졌고 아버지가 새 부인을 들이면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와 살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전했다. 유 대표가 고등학교 때는 방학을 맞아 풍기에 오면 도로를 정비하는 부역에 참여해 성내에서 죽령재까지 올라가며 막걸리를 나르곤 했다.

서울서 보낸 학창시절

풍기초를 졸업한 후에 유 대표는 대학교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당시 홀로 자녀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로 풍기인견을 공장에서 가져와 서울에다 팔고, 다시 서울에서 원사를 들고 풍기에 와서 공장에 가져다 팔고 했던 터라 서울 생활이나 동대문 시장에 대해 잘 알았던 것 같다고 했다.

“중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보는데 우리 어머니는 돈도 없는데 나 보고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고 데리고 갔어요. 시험에 붙어 경희중학교에 들어갔는데 하숙집에 하숙비를 주지 않아 두 달 만에 쫓겨났어요”

동대문 시장으로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보따리 장사를 하니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도 잠잘 곳이 없어 남의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생활해야 했기에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평상시에는 유 대표를 맏이라고 하면서도 등록금 등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부장을 하면서 담임교사가 잘 봐줘 등록금 면제를 많이 받아 다닐 수 있었다.

그 교사는 유 대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금 한 돈을 주기도 했다면서 지난날의 감사함에 눈물을 훔쳤다.

포목 장사하는 어머니 도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어머니는 서울에 집을 얻어 동생들까지 모두 올라오게 했으며, 그나마 형편이 나아져 동대문 시장에 세를 얻어 안감 장사를 하게 됐다. 이때 유 대표는 학교 정규수업을 끝나면 시장에 와서 어머니 장사를 도왔다. 그때부터 돈에 대한 개념이 밝아졌다. 옷이 없으니 교복을 입고 원단을 메고 다녔고 동생도 힘을 보탰다.

“원사를 가지고 풍기에 왔는데 당시에 공장이 몇 개 있었으나 요즘 같은 자동화 공장이 아닌 수직기로 생산량이 적고 원단이 귀했어요. 인견은 남자 양복, 여자 한복에 사용해 귀하고 비쌌고 물건이 없었을 때였지요”

건국대학교 원예과를 원했지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인하대학교 기계과에 들어간 후에는 주로 어머니 가게에 나와 자전거에 원단을 싣고 명동으로 배달해 주는 일을 했다. 그는 색감을 잘 봐 원단의 안감을 배열할 때 색을 잘 찾아낸다. 또 귀가 밟아 야간작업의 경우 공장에서 200대의 기계에서 소리기 이상하거나 불편한 소리가 나면 몇 군데가 소리 나는 것을 알 정도라고 했다.

풍기서 인견공장 사장으로

학창시절에 유 대표의 바람은 아버지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당시에 1만 평의 과수원을 할 정도로 돈이 있어도 아버지는 그에게 등록금이나 생활비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큰 과수원을 하겠다는 바람은 이제 2만평의 과수원으로 이뤘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유 대표는 서울 생활이 싫어져 어머니에게 풍기로 내려가 공장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어머니께 “내가 원단을 만들어 올리면 어머니가 그걸 파세요”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일을 잘했던 아들이 서울에 남아주길 원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장보다 공장 사장이 하고 싶었던 그는 결정한 대로 풍기에 내려와 양계장 하나를 빌려 대구에서 헌 베틀을 사고 천 짜는 기술을 배워 기사를 두고 함께 기계를 만지며 배웠다. 돈이 없고 홀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렇게 ‘복일직물’에서 원단을 짜서 서울에 있는 어머니의 ‘복일상회’로 보내면 원단을 팔았고 그에게 돈을 주면 그 돈으로 원사를 갖고 와서 천을 짜서 만들어 팔았다.

“풍기에 내려와 참 어렵게 지냈는데 그래도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하고 헤어질 적에 우리를 키워준 초가집 하나가 있어 그곳에서 자거나 공장에서 쪽잠을 자면서 오갔죠. 이후에 근처에 땅을 좀 더 사고 나중에 건물을 지었는데 어머니가 보시고 잘했다 하셨죠”

어머니가 운영하던 포목상회는 동생이 서울에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삼화산업’ 법인을 만들어 동생과 유 대표가 같은 주주가 됐다. 이외에도 유 대표는 자신은 풍기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몇 년을 지냈다면서 “동생은 현재 동대문 광장시장에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자신의 뒤를 잘 따라오고 있다”며 “동생과 함께 원단을 많이 팔았고 지금도 삼화산업이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복일직물을 운영하면서 처음 아내를 소개받고 2년 동안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과수원과 공장의 일을 병행해야 하다 보니 결혼은 다음이라고 생각했다고. 일로 바쁘게 지내는 동안 아내는 기다렸고 이후 서로의 마음이 맞아 결혼하게 됐다.

복일공장에서 삼화산업으로

집세가 밀려 복일공장에서 쫓겨나 삼화산업 마당에 기계를 갖다 놓고 있을 때 삼화산업은 당시 주주들끼리 싸움이 붙어 공장이 서 있고 안에 있던 기계도 없애 빈 건물이었다. 이에 유 대표는 돈을 빌리려 했으나 어려웠고 아내에게 고민을 말하니 지인을 통해 대구은행 관계자를 연계해줘 당시 5천만원을 빌려 삼화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등기부 옮겨놓은 게 1983년에 옮겨놨더라고요. 삼화산업이 1973년도에 오픈된 공장이니까요. 큰 공장에다가 헌 베틀을 스물몇 대를 갖다 놓고 비닐을 치고, 불나거나 망한 공장에서 헌 베틀을 사와 닦아서 새로 갖다 채워 넣었죠”

공장도 점점 커져 생산량도 늘어나고, 과수원의 땅도 커지면서 일이 많아졌지만 유 대표는 쉼 없이 열심히 일하고 가족들에게 힘을 얻으며 보람을 찾아갔다.

왼쪽 배준우 생활사 기록가, 오른쪽 유태순 대표
왼쪽 배준우 생활사 기록가, 오른쪽 유태순 대표

남은 인생의 새로운 목표

유 대표는 화섬들, 라이롱은 불이 붙으면 검은 연기가 나고 머리가 아프지만 인견은 연기도 나지 않고 종이 타는 냄새가 난다면서 직접 확인시켰다. 그는 원단을 짜는 여러 가지 방식 중 한 가지로 스웨터를 짜듯이 실을 한 올 갖고 홀치기로 짜는 방식을 소개했다. 또 홈쇼핑에서 파는 제품으로 “세탁기에 막 돌려도 돼요”라고 하는 것은 나일론이 섞여 들어 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삼화산업에서는 순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런닝할 때만 최하 2~3%까지 넣는다며 예전에는 이불을 만드는 사람들이 싸게 하려고 대구에서 풍기로 와 10% 넘게 섞어 해달라고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내 옷은 더 탄탄하고, 촉감도 좋고, 그리고 바느질을 해도 인견은 이렇게 1번, 2번을 더 감아서 잘해줘야 해요. 안 해주면 싸게 하려고, 바느질 싸게 하시는 분들한테 돈을 적게 주면 그냥 후르륵 박아가지고 다 터져 나가죠. 그러면 ‘인견은 못 써’라는 말을 듣게 되고 시장이 죽잖아요”

삼화산업에서 생산하는 품목의 수는 200가지가 넘는다. 원단의 양, 밀도, 어느 품목에 어떻게 하려는지 내부에서만 아는 노하우 표가 있다. 현재 ‘마루미풍기인견백화점’은 아내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유태순 대표는 시원하고 몸에 좋고 정전기가 없는 인견으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면서 시대적 감각보다는 레트로 감성의 순수 풍기인견 100%를 고집하고 있다.

                                      정리 배준우 생활사 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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