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풍기인견’, 국내시장 넘어 해외시장으로 확대되길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시원하고 부드러운 인견에 반해 제품 제작

연사공장·편집기 공장을 풍기 최초로 시작

 

침구류 논스톱 전 과정은 국내, 세계 유일

봉현농공단지 입구에 풍기인견백화점 오픈

“공정 중 외부에 나가는 건 하나도 없어요. 저희가 직접 원단을 직조하고 디자인과 프린팅, 그 다음 봉제하고 워싱까지 다 해서 포장한 후 판매까지 논스톱이죠”

영월이 고향인 신승봉(62) 실크로드 대표는 17세가 되던 해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풍기로 왔다. 양계장에서 일하다 20세가 되던 해 인견 공장에 들어가 처음 인견을 만졌는데,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반해버렸다. 1991년 30세의 나이에 제1공장을 설립하며 실크로드 대표로 인견 사업에 뛰어들었다.

성장과정과 가족이야기

2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신 대표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미혼인 큰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농촌봉사활동을 매년 오면 자신들이 읽던 책을 가지고 와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책 관리하는 일을 그가 자처했다고 한다. 이유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책으로 세상을 배웠다.

초등학교 졸업 전에 큰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지내게 된 신 대표는 하루에 나무 한 짐을 해오면 할머니가 밥을 주셨는데 책임감을 가르치려 엄하게 교육하면서도 사랑을 넘치도록 주셨다고 했다.

어느 날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물을 길러 나가시다 넘어져 3년을 병석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셨고, 그는 병간호에 끼니 걱정까지 하며 지냈다. 이에 동네 밭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돈을 벌었는데 일을 잘해 동네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17세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풍기에 입성, 일하며 공부 열정도

1978년 풍기에서 영월로 배추농사를 지으러 오던 사람을 따라 신 대표는 풍기로 왔다. 풍기에 가면 돈 벌 곳이 많다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백신동 양계장이 첫 일터로 1년에 40만원을 받았다. 그는 돈을 버는 게 좋았고, 남들은 힘든 일이라고 해도 영월에서 하던 일에 비하면 양계장은 쉬운 일이었다.

더욱이 아는 분이 받은 돈을 이자도 받게 해주었고 돈을 벌기 위해 더 악착같이 아끼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참을 수 없었던 신 대표는 백신동에서 풍기 시내까지 야학에 다니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대광견직’서 만난 인견의 매력

한겨울에 허름한 옷과 낡은 신발로 밤길을 다니는 게 춥고 힘들었던 그는 고민 끝에 야간학교를 다니기 위해 양계장을 그만두고 풍기 시내에 있는 바디공장에 취직했다. 바디공장에서 몇 개월 근무하다가 직물공장인 대광견직에 일자리가 생겨 입사하면서 인견을 만나게 된다.

처음 인견을 볼에 대었을 때 실크처럼 부드러운 촉감에 그는 인견에 매력을 느꼈다. 사업하기에 좋은 아이템이라는 생각을 했고, 10년 후 인견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꿈을 꾼 것도 그때의 일이다.

당시 급여를 6만5천원 받기로 하고 들어간 공장에서 첫 월급으로 7만5천원을 받았다. 그만큼 그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대광견직 윤정대 대표는 인정 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6만5천원을 재형저축하고 남은 1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인생 최고의 인연, 윤정대 대표

1981년은 인견이 활성화되던 시기. 대광견직에 취직해 윤정대 대표를 만난 건 그에게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그는 윤 대표에게 직원들의 잘못을 타박하지 않고 묵묵히 뒤처리를 해 주는 모습과 검소한 모습, 최신식 설비에 투자하는 모습과 신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스스로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유공이라는 최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3년이 지나고 준기사로 진급한 후에는 새로운 기계를 사러 갈 때마다 윤 대표는 그를 동행시켰다. 영특하고 센스 있고 강한 책임감으로 신임을 얻으며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10년 후의 꿈을 다졌고, 어느 날 윤 대표가 체크무늬를 개발한 것을 보고 꿈을 더 견고히 했다. 윤 대표가 공장의 유휴지에 있는 집을 기숙사로 빌려줘 그는 손수 집을 고치고 텃밭에 채소를 재배해 반찬값을 아꼈다.

믿음 하나로 함께한 아내

대광견직에서 만난 아내는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며, 일을 잘해 한눈에 반했다. 결혼 후에도 맞벌이를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세 번만 프러포즈할 거라는 단서를 달았다.

두 번째 프러포즈에서 아내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보라는 말에 찾아갔으나 어린 나이를 핑계로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고.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함께 살 것을 제안했고, 완강히 거부하던 아내도 강한 책임감을 가진 그에 대한 사랑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두 아들을 낳아 공장이 안정된 후에 그는 아내와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인견에 반한 청년, 꿈 이뤄

1991년 인견을 만난 지 10년 만에 그는 꿈을 이뤘다. 10년 동안 근무하던 대광견직에서 퇴직금 대신 최신 개량된 기계인 스타코마 수직기 6대를 받았다.

풍기 시내에 쓰러져가는 건물을 임대받아 기계를 들여놓고 대진직물이라고 상호는 정했지만, 간판도 없이 기계를 옮겨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와 둘이 일하며 그는 공장 안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고, 아내는 처갓집으로 퇴근을 했다.

“철커덕거리는 기계소리는 소음이 아니었어요. 꿈이 이루어지는 소리였죠. 재활용과 개발과 설비투자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윤정대 사장님에게 배운 것들이에요”

봉현농공단지으로 이전 확장

신 대표는 공장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현농공단지 내 우백인견을 임대해 이전하며 기계를 6대 더 들였다. 우백인견의 간판도 그대로 썼다.

인견 침구류에 대한 전망으로 그는 좀 더 넓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자카드기계로 설비를 교체했다. 하지만 판매보다는 설비투자에만 전념하다 보니 경영이 어려워져 새로운 제품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며 제품생산에 매진했다.

총 4명이 2교대 근무를 했는데 그중 2명은 그와 아내였다. 추진력과 결단력이 빨라 가끔 후회도 하지만 그로 인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는 믿는다. 이후 대구까지 원단을 직접 배달까지 해 주니 판매도 상승했고, 섬유업이 고난을 많이 겪었던 IMF때도 그는 오히려 매출이 상승했다.

인견 직조에서 판매까지 논스톱 공정

신 대표는 이후 17년 사용하던 우백인견을 나와 새로운 터를 구입해 건물을 짓고 ‘실크로드’라는 새로운 간판을 걸었다. 2001년 설립한 실크로드를 기점으로 연사공장, 편집기 공장을 풍기 최초로 시작했다.

최신기종으로 기계도 교체했다. 그리고 2006년 인견전문판매점인 풍기인견백화점을 봉현농공단지 입구에 대형 매장으로 오픈했다. 입구에는 대형 간판을 설치하고 365일 불을 끄지 않는다. 풍기인견을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에게도 알리는 게 목표였다.

침구류에 대해서는 원사를–사이징–연사과정-재직-디자인-디지털프린트-누빔-워싱-논슬립-마무리봉제-포장-출고-판매로 이어지는 논스톱과정을 풍기 최초로 완성했다. 백화점, 타 지역 큰 업체들에 납품하며 도매 판매도 시작했다.

하지만 의류의 일부 과정은 외부에 위탁해야 했다. ‘설비는 원가 절감, 곧 소비자들에게 저렴하게 판매’라는 생각으로 최신설비투자와 개발에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실크로드는 1991년부터 2013년까지 쑥쑥 성장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화학섬유가 아닌 인체에 가장 자연 친화적인 인견이며, 설비투자와 끊임없는 제품개발, 원칙에 충실하며 정직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를 늘 새긴다. 이를 위해 2001년 천연나노소재 웰빙 침구를 개발한 그는 2005년 무기물을 이용한 개발에 이어 디지털프린트기를 10억에 마련했다.

홈쇼핑 진출의 진통, 특허권 신청

2012년 신 대표는 침구와 의류시장의 흐름을 읽으며 판매량을 올리려면 홈쇼핑 입점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주변 업체들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 그는 제품을 생산하지만, 자신의 상호로 판매를 하지 않는 OEM방식으로 홈쇼핑에 제품을 납품했다. 매출은 매년 급성장했다.

특허권에도 관심을 가져 인삼과 인견의 콜라보로 염색방법에 관한 것, 무좀이 있는 분들을 위해 인견 발가락지로 특허를 받았다. 또 브랜드네임으로 레이쿨, 라스카, 레이핫 등 다수의 브랜드네임 특허도 가지고 있다. 머드염색, 황토염색, 은행나무 징코를 이용해 기능성 인견 개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공신력 있는 기능을 인정받기 위해 섬유개발원에 의뢰해서 소취성, 항균성, 냉감성을 인정받고 싶었다. 원단에서부터 문양, 디자인, 컬러 등 다양한 부분에서도 많은 개발을 했다. 또 1회 심사에 3천만 원이 들어갈 정도로 심사가 까다롭다는 로하스인증도 받았다.

이는 염색이나 부자재를 사용하면 인증마크를 받을 수 없는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인체에 해롭지 않은 순수원단이라는 인증이다. 풍기인견이 정말 좋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줄 수 있는 로하스인증마크를 그는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풍기인견이라는 브랜드를 풍기에서 나는 인견에만 사용할 수 있는 지리적단체표장을 신청하자고 영주시청에 제안한 사람도 바로 신 대표이다. 주로 지리적단체표장은 식품이나 농식품으로 신청할 수 있는데 공산품으로는 이례적이었다.

홈쇼핑의 러브콜, 공영홈쇼핑 콘테스트 1위

신 대표는 올해 5월 공영방송에서 공모한 콘테스트에 인견으로 만든 죽부인으로 공모한 결과 장년부 1등으로 선정돼 상금 1천만 원과 공영홈쇼핑에서 수수료 없이 판매할 수 있는 기회도 획득했다. 죽부인을 보고 CJ홈쇼핑에서도 동시판매를 실시해 1천 세트를 신승봉 대표가 원한 더 비싼 가격으로 완판의 쾌거를 이뤘다.

“인견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고 말하는 그는 풍기인견이 한국시장을 넘어 해외시장을 넘봐도 좋을 만큼 매력 있는 상품이라고 했다. 현재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신승봉 대표는 “서로 협력하고 화합하는 것만이 풍기인견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또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참신한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밖에는 없다”며 “42년 동안 인견업에 종사했는데 스스로 자수성가한 기쁨보다는 아직도 압박감이 크다. 하지만 곁에서 함께 공장을 함께 이어가고 있는 두 아들을 생각하면 든든하다”고 말했다.

                            정리 전영임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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