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3세대, 풍기인견으로 가업을 일구다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풍기서 원단이 아닌 인견 제품 만들기 시작이 처음

호황 맞아 주문량 늘며 지역에 경제활동 기회 제공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또 어떤 분들이 오시고 어떤 물건이 많이 나갈까 기대가 된다”

인견하우스 김정한(70) 대표는 한국전쟁 전 풍기로 내려온 실향민 3세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견 공장에 취업한 후 인견 판매와 인견 옷을 만들어 오며 일흔이 된 지금까지 인견을 손에서 놓지 않은 인견인이다.

실향민, 풍기에 정착

전쟁의 소문을 들은 할아버지는 정감록에 실린 피난지인 풍기로 할머니와 세 아들을 데리고 이북에서 내려왔다. 그런 후 “잠시 있으면 내가 이북에 들어갔다 나오마. 갔다 나오마”하고는 그 길로 이북에 간 할아버지는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세 아들을 데리고 금계동에서도 더 올라간 용천동 산골짜기에서 산비탈을 개간해 논밭을 일구며 살기 시작했다.

출생과 어려웠던 가정환경

김 대표의 외가는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거느릴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한다. 아들이 여섯에 딸이 하나로 부유한 집에서 생활한 김 대표의 어머니는 결혼 후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힘들게 생활했다고 했다. 바느질과 음식을 잘해 동네에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음식을 만들고 옷도 못 하는 건 해달라고 했단다.

“어머니가 재봉틀이 있었는데 남자들 한복, 조끼, 저고리, 두루마기도 예쁘게 잘하시더라고요. 그때 내가 잘 배웠으면 될 건데 안 배웠네요”

아버지는 처음 금계동에 내려와 농사를 짓다가 서부3동에서 수직기와 손으로 짜는 똑딱기 몇 대를 갖다 놓고 공장을 운영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문을 닫았다.

한학을 했던 김 대표의 아버지는 해마다 풍기향교에서 재를 지내고 시조를 지어 박정희 대통령상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다 한의사를 한다며 예천으로 가서 한약방을 했고 인삼농사도 지었으나 수해로 저수지가 터져 쓸려 내려갔다. 더욱 살기가 힘들어지고 아이들은 커가는데 공부도 거의 시킬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사셨다고 했다.

유일한 학창시절, 인견공장 취업

풍기초등학교에 입학한 김 대표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새로 지은 풍기북부초로 다니게 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인삼 반 접을 깎고 등교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나서야 했기에 집에서 가까운 공장에 들어가 일했다.

“졸업하고 나서 바로 거기 공장에 갔는데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전기로 안 돌렸어요. 지금은 달랭이라 하기도 하고 꾸리라 하기도 하는데 그걸 감는 일을 시작했어요. 한 5~6개월 했을 거에요”

베를 짜야 돈을 더 많이 벌겠다는 생각에 몇 달 다니다 직접 다른 공장을 찾아가 “직수 구해요?”하며 물어보고는 “베 짤 줄 아느냐?”는 물음에 잘은 못했지만 “알아요”라고 답해 일할 수 있었다. 15세였던 그때부터 김 대표는 베를 짜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다 보니 일하는 여직공들이 나이가 더 많아 김 대표를 예뻐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얼른 와서 해주고 갔으며 그것을 유심히 봐뒀다가 다음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직접 해냈다고 했다.

인견으로 맺어진 결혼

김 대표는 직접 찾아가 두 번째로 들어간 인견 공장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시댁에서 하는 인견 공장 운영과 정미소 일에 관여했는데 운수업도 했던 시아버지가 의성 등에서 보리를 수매해 오면 찧어 파는 일도 했다.

당시 25세였던 남편은 어른들의 말에 따라 선을 보기도 했지만 “나는 다른 색시들은 마음에 안 들고 얘하고 결혼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 형편이 달라 어려움도 있었지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18세에 결혼했다. 이후 10년 동안 열심히 생활한 김 대표는 집안 식구들에게 무엇이든 잘해 금손이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북에서 내려온 시댁

평안남도 덕천에 살았던 김 대표의 시댁 식구들도 6.25 전쟁이 나기 전 풍기로 왔다.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던 시아버지는 남들보다 전쟁이 날 것이라는 소문을 빠르게 들을 수 있었다고. 모든 재산을 정리해 정감록에 나온 풍기로 온 시댁은 처음에 농사를 지었다가 부석으로 가서 2~3년 살다 다시 풍기로 나와 직조 공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인견을 팔러 다닌 새댁

당시 사람들이 단색으로 염색된 인견을 산 후 원주, 제천 등에 가서 파는 것을 보고 김 대표도 인견 판매를 하고 싶어졌다. 둘째 아이를 낳고 돌이 지났을 무렵 시어머니께 몇 시간만 아이를 봐달라고 말한 후 우라 다섯 필을 머리에 이고 영주로 갔다.

그렇게 갓 스물을 넘은 나이에 양복가게마다 다니며 “우라 살래요?”라며 팔러 다녔다고. 원단을 팔러 다니는 것을 싫어했던 시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며칠 쉬었다 가도 다시 팔러 나가고 싶은 생각에 원단을 들고 나갔다. 그렇게 며느리가 원단을 잘 팔고 돈을 벌어오니 시아버지는 “이제는 공장에 와서 원단, 우라 가지고 가라”고 지원을 해줬고 그때부터 한 필을 팔면 얼마큼의 돈을 김 대표에게 남겨줬다고 했다.

“요새 생각하면 집안 일을 하며 그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어요. 직거래 하니 단골집도 많이 생기고 괜찮더라고요. 살림을 나와서는 김천, 영천, 원주, 도계, 삼척, 정선까지 버스, 기차를 타고 다녔어요”

독립과 인견 공장

30대를 앞둔 시점에 뜻하지 않게 독립하게 된 김 대표는 42만원으로 집을 지어 분가했다. 어려워진 형편에 원단이 나올 곳이 없어지니 장사도 중단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익숙한 원단공장으로 가지고 있던 반지와 목걸이, 돌반지를 팔아 공장을 짓고 기계를 살 돈이 없어 친정집에 도와달라고 해서 150만원으로 반자동베틀 6대를 샀다.

그렇게 ‘동한직물’을 시작해 열심히 살며 몇 년을 원단을 짜서 서울 도매상에 팔았는데 어음을 끊은 것이 부도를 맞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천을 짜면서 다시 장사를 시작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다니며 3년여를 버티며 형편이 나아졌다가도 또다시 어음으로 4천만원을 날리기도 했다.

“영주, 안동, 의성도 가고, 아래로는 영천까지 내려가고 옆으로 예천, 점촌, 김천 이렇게 한 달이면 20일은 나갔다고 봐야죠. 오로지 ‘이걸 팔아야 되고, 살아야 된다’라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새벽에 나가서 밤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죠. 물건을 버거울 정도로 들고 다녔어요”

인견제품 판매로 일어서

김 대표는 공장도 팔고 돈도 없애고 사람에 치이고 모든 것을 다 잃은 데다 39세가 되던 해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공장에서 짰던 천으로 검정색, 곤색, 밤색 등이 많이 남아 진한 색을 바지로 연한 색은 윗옷으로 만들어 가정을 꾸려갔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지나 제자리를 찾다 10년이 흐른 후 조금씩 형편이 좋아졌다.

“우리는 IMF를 못 느꼈어요. 주문이 많아 일을 못 쳐나가잖아요. 내가 재단해서 일을 주면 주위 아줌마들이 집에서 바느질해서 아침, 저녁으로 갖다 줘요. 그러면 보따리 장사들이 오면 속바지, 민소매 티를 다 판매했는데 없어서 못 팔았어요”

김 대표가 인견제품을 만들기 시작해 판매한 후부터 풍기지역에는 인견매장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17년 전쯤에는 운영하는 매장에서 며느리들과 함께하면서 하루에 1천700만원을 벌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그렇게 창고와 같은 작은 공간에서 옷을 판매했던 김 대표는 이후에 공간을 새로 지어 넓혀가 인견 원단공장을 직접 지었다.

지금은 원단 생지를 사서 가공소로 보내 염색되면 부산은 긴 원단, 대구와 서울에서 나염지를 용도에 따라 디자인을 찍는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장 조사도 다니는 김 대표가 전체를 두루 살펴본다면 큰며느리는 물건을 구입하고, 작은며느리는 세무관계를 담당한다.

옛날 인조집이라고 불리던 매장은 ‘인견 하우스’로 바뀌었고 이제는 전국에서 도소매로 물건을 주문하거나 사러 오고 있는 장소가 됐다.

아직도 일밖에 모른다는 김정한 대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저 겨울을 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며 “자녀들에게는 ‘경기가 없다고 해도 밥 먹고 살 정도로만 하면 된다. 아프지 말고 열심히 해라’라고 당부한다”고 말했다.

                                정리 홍애련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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