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으로 풍기에 정착, 풍기인견 발전에 이바지하다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직물공장 번성으로 철물공장·철공소·목재공장도 흥행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던 베틀은 살아온 삶의 여정

김병열 전 대영직물 대표
김병열 전 대영직물 대표

“장티푸스로 앓아누워 사경을 헤맬 때 그날 밤 어머님이 오셨어. 내 머리맡에 앉아서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더라고, 정신을 번쩍 차리고 보니 아무도 없데? 아마 내 걱정을 많이 하신 모양이래, 그때 어머니가 가장 보고 싶었지”

김병열(90) 전 대영직물 대표는 고향인 황해도 벽성군에서 1남 4녀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6.25 전쟁이 일어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전쟁포로가 됐다. 종전이 선언됐지만, 탈영병의 몸이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해 혈혈단신 남쪽에 남았다. 이후 정감록을 믿고 풍기로 이주해 온 고향 아재를 만나 인견을 시작하게 됐다.

고향에서의 생활

6.25전쟁 전까지 그는 고향에서 가족들과 생활했다. 당시 논이 1천500평, 밭이 3천평 정도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말을 못 쓰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왕이 사는 동쪽을 향해 강제로 궁성요배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해방이 됐다. 어린 기억에 만주에서 내려오는 일본 패잔병들을 피해 숨기도 하고 광복 때는 태극기를 들고 골목으로 나가 만세를 외치는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 김일성이 정권을 잡고 모든 재산을 압류해 국유화를 시켰다. 그리고는 가족 수에 비례해 땅을 분배하고 농사를 지으면 3:7로 분배하게 했다. 말로는 3:7이었지만 척박한 땅에서 피땀 흘려 지은 농사 대부분이 몰수당하기 일쑤였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농삿일을 하고 와서도 목화솜을 타서 옷을 해 입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존경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어린 날의 그는 낮에는 나무를 해서 불을 때기도 하고 30리길 시장으로 지게에 나무를 지고 나가 팔기도 했으며, 저녁에는 새끼를 꼬며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가 위장이 좋지 않아서 늘 고생해 어린 그가 해주까지 60리를 걸어 조개껍데기를 주워 와서 불에 구워 곱게 갈아 위장약 대신 드시게 했는데 효과가 좋았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야간중학교를 2년 다니다가 죽천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18세에 참전한 한국 전쟁과 포로수용소

죽천중학교 3학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조국이 부르니 나가서 싸우자고 학교에서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오라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점심을 함께 먹고, 주먹밥을 가지고 다시 학교로 왔다.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50년 9월 15일 별성군 집합소 학도병으로 징집을 당한다. 그 후 해주, 사리원으로 이동해 평안남도 강동 비행장에 배치됐다. 전쟁에서 1차 교전 후 평안도 안주, 승천, 영변으로 낮에는 숨고 밤에만 행군했다. 방공호에서 교전하는데 무섭고 총도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대장 집에서 잠을 잤는데 밤에 다시 행군을 위해 나오다가 소대장이 친인척들과 인사하는 사이 학도병 10여 명이 함께 산속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한꺼번에 움직이면 들킬 염려가 있어 3명이 한 팀이 돼 문산까지 도망갔지만, 다시 북한 병사에게 잡힌다.

도망과 잡히기를 몇 번, 1950년 10월 26일 유엔군 흑인병사에게 붙잡히면서 전쟁포로가 됐다. 청천강을 건너 안주형무소, 평양형무소, 인천소년형무소를 거쳐 부산 가야수용소와 거제 77수용소로 이동하며 포로생활이 이어졌다.

먹을 것이 없어서 며칠 굶기는 여사였고, 혹독한 추위에 제대로 된 양말과 옷도 없이 버텨야 했다. 그 와중에 수용소 사람들끼리 사상으로 인한 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그때 중립국 감시단에서 수용소 사람들에게 남쪽, 북쪽, 중립국 중 선택하라고 해 분리를 했다. 그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버리고 남쪽을 선택했다.

북한에서는 탈영병이었기 때문에 돌아가면 아오지탄광으로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대통령은 포로 해방을 선언했다. 1954년 2월 북한에서 전쟁포로 소환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소환당할까 봐 경주 안강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남한에 남게 됐다.

포로시절 함께하던 고향 친구 최진수씨를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플 때마다 죽을 끓여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던 그와 공병학교를 지원했는데 최진수씨만 합격하면서 헤어지게 된다. 그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최진수씨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군대시절 전우들과 함께
군대시절 전우들과 함께

남쪽 군대에 지원하면서 만난 인연

1954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됐다. 혈혈단신 남한에 남은 그는 군 입대를 지원해 그해 9월 군 입대–포항–제주도 훈련소–공병학교–영천 건설공병단 배치–문서연락병이 된다. 그러다가 위장병으로 경주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군 병원이라 서무계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꿀 인연, 박춘택을 만났다.

박춘택은 풍기 근처 안정에 거주하는 후임으로 그의 고향이 이북인 걸 알고, 자신의 고향인 풍기에 가면 이북사람들이 많다고 휴가 때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갈 곳도 없었던 그는 후임을 따라 안정으로 온다.

안정에 온 다음 날이 풍기 장날이었는데 장터 구경을 나왔다가 우연히 고향 아재를 만나 서로 반가워했다. 그러나 부모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제대하면 먹고 살 수는 있으니 풍기로 오라는 말을 듣고 그는 군대에 복귀한다. 그 후 춘천으로 이동 화천 6사단 보충대에서 근무하다 제대 후 풍기로 다시 오게 된다.

군대 제대 후 풍기에 입성

40대 중반이었던 아재는 풍기에서 가정을 이루고 인견공장을 하고 있었다. 해방 후 재산이 몰수당하자 일찌감치 정감록을 믿고 풍기로 온 아재는 어느 정도 안정돼 있었다. 아재의 집에서 먹고 자고 아재가 하는 인견공장을 다니며 가족처럼 지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처음 북실 감기부터 시작했는데 먹고 자기 때문에 따로 월급은 없었다. 돈이 필요했던 그는 아재에게 이야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제천에 충북선 공사현장으로 노동일을 하러 간다. 그러던 중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안동으로 가야 했는데 현금을 가지고 갈 수 없던 터라 그곳에서 벌었던 6만원을 화약주임에게 빌려줬다가 몽땅 떼이고 만다. 그는 다시 아재의 인견공장으로 돌아왔다.

직물조합 야유회
직물조합 야유회
1970.05.03 경주박물관에서 '직물조합 부부야유회'
1970.05.03 경주박물관에서 '직물조합 부부야유회'

결혼과 수직기 4대로 시작한 인견 공장

28세 되던 1961년 10월 1일 결혼한 그는 처가가 이북에서 정감록 믿고 풍기에 미리 정착해 농사와 인견공장을 병행하고 있었다. 아재는 그를 분가시키며 수직기 4대를 주었고 헛간에 수직기 4대로 가내공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장이 잘 안돼 옥녀봉에서 나무도 해서 팔고, 공공근로로 밀가루를 배급받고, 먹을 것이 없어 아내가 결혼 때 해 온 베개에 든 서숙까지 꺼내 쪄서 먹기도 했다. 돌아보면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아내였다고 했다. 친정에서 이미 베틀 일을 해봤기에 수월하게 인견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고, 모든 일을 아내는 헤쳐나갔다.

그는 아내가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해냈고 다행히 인견공장이 잘 되기 시작했다.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첫 아들도 태어났다. 어느 날 아재는 연탄공장을 하겠다며 자신이 사는 집을 그에게 사라고 했고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풍기에 와서 처음으로 정착한 그 집을 3만원에 샀다. 그때 샀던 집에서 지금껏 살고 있다.

풍기 경제를 살린 인견

1956년 이후 풍기에는 인견공장이 늘어났다. 각 지역 사람들이 인견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풍기의 하늘은 베틀소리로 요란했다. 손에 염색물만 묻어있으면 음식점에서는 외상으로 얼마든지 먹고 가라고 할 만큼 인견공장에 다니는 손님을 반겼다.

직조한 인견은 알뜰네라는 곳에 짊어지고 가면 외지에서 도매상이 와서 거래가 이뤄졌다. 아기들은 베틀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고, 부모들은 베틀을 돌리느라 잠들지 못했다. 직물공장의 번성으로 풍기는 철물공장, 철공소, 목재공장도 흥행했다. 풍기오일장은 풍기주변과 강원도, 단양에서도 올 만큼 큰 장이 됐다.

삼화산업 설립과 폐업

1973년 6명이 동업으로 삼화산업을 설립했다. 봉현농공단지에 일반농지를 사서 공장을 지었다. 쌍용에서 나온 승리 기계 100대를 설치해 나일론을 짰다. 직접 운영하는 대표자가 있었고 그는 출자만으로 동참했다. 하지만 4~5년 운영하다 경영의 어려움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폐업해야만 했다.

고향, 그리운 가족들

인견공장이 잘 되자 그는 옆집을 사서 공장을 확장했다. 기계도 열여섯 대로 늘었다. 공장 이름도 지었다. 큰아들의 이름을 딴 ‘대영직물’이었다. 수직기를 동력기로 교환도 했다. 하지만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수시로 밀려왔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티푸스를 앓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 갈 때, 그는 깊은 밤 머리맡에 걱정스럽게 앉아계시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를 부르며 눈을 떴으나 어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았고, 그 후 신기하게 그는 완쾌했다. 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로 떠들썩할 때 북한에 계신 부모님 소식에 기대를 걸고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으나 북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대구 직물조합 창립 30주년 기념패
대구 직물조합 창립 30주년 기념패

IMF, 미련 없이 선언한 폐업

인견공장은 그런대로 잘 운영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직물을 짜면 동대문으로 팔러 갔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가 됐다. 그러다가 IMF가 찾아왔다. 받은 어음은 부도가 나고, 또 직물을 납품했지만, 현금이 아닌 완성된 제품으로 받기도 하고, 물건값만큼 현금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빠른 판단을 내리고 공장을 폐업했다. 그 덕분에 손해를 덜 봤고, 아직도 폐업한 그때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1954년부터 1997년까지 43년 인견과의 인연에 끝을 맺었다.

다시 돌아본 인견업

그는 인견 사업으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학업과 인견 지식에 대해 더 많이 배우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던 베틀은 그가 살아온 지난한 삶의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풍기인견은 그의 삶, 풍기에 뿌리내리며 살게 된 기초이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

고생한 아내가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어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데 큰아들과 함께 살며 아내를 보내고 맞이하는 일을 그가 맡아 한다. “나란 사람을 만나 고생만 한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지금도 늘 가슴으로 그리는 고향 미울면 동호리의 골목길, 돌 하나까지 기억한다는 김병열 전 대영직물 대표는 고향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전영임 생활사 기록가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