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열두 달 풍기인견이 전국을 넘어 세계로 수출되길...”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인견업체 최초로 체크원단으로 의장등록증 받아

외환위기도 잊은 채 대형 유통시장 진입에 노력

허영란 대광인견 대표
허영란 대광인견 대표

제품을 지루하지 않게, 항상 우리가 옆에 둘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든다면, 호불호 없는 짜장면처럼 100년, 200년 갈 수 있는 제품으로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요” 

7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대광인견은 풍기인견의 명성을 이어가는 기업으로 1대 창업자인 윤정대 회장이 ‘대광직물’로 시작해 며느리인 허영란(58) 대표가 2대째 가업을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허 대표는 윤 회장의 아들 윤영근 대표와 결혼한 이후 남편과 함께 가업을 위해 직접 발로 뛰며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서문직물’의 맏딸

평안북도가 고향인 허 대표의 부모님은 월남한 실향민으로 풍기에서 가정을 일군 후 ‘서문직물’이란 인견 제직 공장을 운영했다. 허 대표는 유년기 때부터 직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랐고, 공장과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며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일손을 도왔던 듬직한 맏딸이었다. 서문직물의 여직공들도 그녀를 유난히 예뻐해 함께 사진을 찍었던 추억도 있다.

그 시절을 회상하던 허 대표는 “어머니의 쪽잠을 위해 40분에 한 번씩, 달랭이 기계에 실을 당겨 넣어주는 일도 했고 막냇동생을 업고 다닌 기억도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좋아한 그녀는 장래희망으로 도서관학과를 가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풍기에 도서관이 처음 생겼을 때는 좋아서 바로 회원으로 등록할 정도였으며, 지금도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책장부터 살펴보게 된다고 한다.

서문직물을 운영하며 4남매에게 어떠한 것이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의 사랑으로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허 대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공장이 문을 닫게 됐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고향인 풍기로 돌아온 그녀는 1991년에 대광직물의 5남매 중 셋째인 윤영근 대표와 결혼하면서 다시 인견 제직 공장의 며느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됐다. 일을 하면서도 다시 패션디자인학과로 편입해 공부했고, 판매나 섬유 마케터 등의 과정까지 틈틈이 이수하는 열정도 보였다.

공장 내부
공장 내부

‘대광직물’ 창립자 윤정대 회장

황해도 장연군 출신인 윤 회장은 해방 후 1947년 정감록 십승지 지역 중 일승지인 풍기로 혈혈단신 내려온 실향민이다.

당시 가내수공업 개념으로 집에서 족답기 1대로 인견 제직을 시작해 허 대표의 시어머니인 이필순 여사와 결혼한 뒤 5남매를 낳아 가정을 이루며 ‘대광직물’을 운영하면서 70여 년의 세월 동안 인견 발전에 일조했다.

1978년도에 중소기업 차관자금 지원으로 이탈리아산 철제 자카드 직기 32대를 풍기에 도입하면서 큰 무늬와 대폭 직물 생산이 가능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1997년엔 인견업체 최초로 체크원단으로 의장등록증을 받은 인물이다. 이렇게 풍기인견 발전에 공헌한 윤 회장은 2008년에는 중소기업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도에는 풍기인견발전협의회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감사패도 받았다.

허 대표는 시아버지인 윤 회장에 대해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존중해 준다고 했다.

“우리 아버님은 아무리 아랫 분들일지라도 하대를 하신 적이 없대요. 그리고 공장에 들어가셔도 잔소리 같은, 지금 저한테도 잔소리를 해 본 적이 없으세요. ‘뭘 해라’고 이렇게 요구하신 적도 없고요. 잔소리하는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주셨다고 해요”

당시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이 말하길, 윤 회장은 틀린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냥 손수 옮겨놓거나 그것을 고쳐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그 뒤에 일하는 사람이 그걸 보고 따라 하면 됐다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하기보다는 몸소 보여주면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이 할 일만 충실히 하셨다고 했다.

이외에도 윤 회장은 대한광복단 기념공원의 평화통일 기념탑이 세워지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추진위원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탑 건립기금도 일부 쾌척할 정도로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면서 실향민으로서 누구보다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자연을 품은 ‘대광인견’

대광인견의 변화를 보면, 이전에는 원단만 판매하던 것을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체크 원단의 인기와 더불어 95에서 110까지의 4가지 사이즈로 여러 컬러의 트렁크 팬티까지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도 잊은 채 본격적인 대형 유통시장으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했고, 2011년도에 오프라인 매장의 문을 연 것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유통망을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백화점, 대형마트 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판매 행사를 했고 휴게소까지 진출하게 돼 2014년에는 안동휴게소와 칠곡휴게소에서 속옷부터 의류, 침구까지 대광인견의 전 제품을 판매하게 됐다.

“휴게소야말로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로 그곳에서 과연 인견 판매가 가능할까 싶었지만, 그 편견을 깨고 성공적인 결과를 거뒀어요. 2015년도에는 대구경북 국제관광 박람회, 세계 한상대회 기업전에 참여하면서 카탈로그 제작, 홍보 전략, 제품 준비까지 모든 것을 손수 준비했죠”

호기심이 많다는 허 대표는 첫 행사는 어떤 분위기인지 무조건 가봐야 한다는 남다른 열정을 내비쳤다.

2015년 5월에는 안동 리첼호텔과 일대일 협업으로 호텔 컨벤션 센터 1층에서 ‘호텔, 한국 인견을 입다’라는 이름으로 대광인견 단독 의상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풍기인견 서울 페스티벌과 지역축제인 풍기인삼축제도 빠지지 않았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외부 매장에서 꾸준히 제품 판매를 하며 지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왔다.

박람회 참가 모습
박람회 참가 모습

대표로서 끊임없는 노력

허 대표는 자연스레 가업을 물려받아 대광인견을 운영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그녀는 영업사원 능력 개발 과정에서 판매를 수료하는가 하면 섬유 마케터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행정학을 전공했으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패션디자인학과로 편입해 배움에 대한 열정도 놓치 않았다.

이에 대해 허 대표는 “그때는 진짜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다. 내가 찾아보고 대구까지 운전하고 다녔는데 그런 것들이 힘들질 않았다. 그냥 ‘당연히 배워야 되겠다’라는 생각이었다”며 “교수님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도움을 주시는 분들 덕분에 견뎌 낼 수 있었고, 그분들이 있어서 바쁜 와중에도 끊임없이 배우고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정해 창업 초기에 있는 개인이나 기업을 입주시켜 실무 교육, 수출, 경영, 회계, 컨설팅, 마케팅 등 기업에 필요한 것들을 교육해주고 정보를 주는 동양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7년 동안 입주해 다양한 지원을 받으면서 경영과 관련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창업보육센터를 통해 허 대표는 ‘글로벌 해외 마케팅 지원 프로그램’으로 2018년도에는 베트남을 방문해 현지에서 제품 홍보, 바이어 상담회, 중소기업 교류센터 관계자 간담회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고 했다. 면담이 있던 지난 9월에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산림박람회에 처음 참가하게 돼 바쁘게 준비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설레는 모습을 내비쳤다.

사계절 제품 개발이 목표

같은 제품으로 머무를 수 없으니 매년 새로운 제품을 선보인다는 허 대표. 그녀는 제품의 다양화를 위해 필요하면 어느 곳이든 직접 시장 조사를 다니고 패션쇼나 패션 잡지를 보며 그 해의 트렌드를 공부한다. 그런 가운데도 기본은 항상 100년 갈 수 있는 옷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유행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열정을 다해 대광인견을 이끌어오는 허 대표는 “인견이 여름이라는 계절상품에 국한되는 문제점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의 숙제로 열심히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계절상품이 아닌 1년 열두 달 꾸준히 가는 상품을 만드는 동시에 많은 제품 중에 1~2가지 제품이라도 상품화시켜서 수출을 목표로 한다”는 당찬 포부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허 대표는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존경하는 부모님이 일궈오고 물려준 이 자리에서 누가 되지 않도록 잘하고 겸손하게 이끌어 나가겠다”며 “개인적으로는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라고 차근차근히 또 제 앞길을 헤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 김태연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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