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에 마지막 남은 ‘정경사’…“누군가 이어갔으면…”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풍기인견 정경사로 유일하게 현업에 종사

고품질 혼합 인견이 발전하는 과정 함께 해

이기형 풍기인견 정경사
이기형 풍기인견 정경사

“친구들은 전부 퇴직한 나이지만, 저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으니 풍기인견에 감사할 따름이죠”

충북 단양군 적성면이 고향인 이기형(66)씨는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풍기로 이주했으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형제들끼리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인견 생산 분야에 47년 동안 종사한 그는 힘든 시절을 풍기인견 정경사로 일을 하며 이겨낼 수 있었고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현재는 현업에 종사하는 유일한 풍기인견 정경사로 삼화직물에서 근무하고 있다.

풍기에 정착, 힘든 성장기

이기형씨는 3살 때 단양에서 부모님을 따라 풍기로 이사를 왔다. 먼저 풍기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버지의 여동생 곁에 왔지만 일이 많지 않아 농촌에 며칠씩 품을 팔아 곡식을 받아오는 것이 전부였기에 생활 형편이 무척 어려웠다. 6살 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활은 더더욱 힘들어졌다고. 그렇게 직업이 없던 아버지는 몇 년을 고물 장사를 했으나 60세가 넘은 나이로 또 다른 직업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풍기읍내는 비포장도로에다 시내도 초가집이 많았어요. 차가 한 번 지나가면 먼지가 막 일고, 그때는 사는 게 다들 어려웠어요. 인견은 가내 수공업식으로 창고같은 데다가 기계를 몇 대 놓고 원단을 생산해서 보따리에 싸가지고 가서 한 필, 두 필씩 팔았죠”

당시는 원단을 한 보따리 가져가서 팔면 집에 올 적에는 돈을 보따리로 가져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인견 원단이 부드럽고 시원하며 고급이었기에 값도 정해진 것이 없었고 마진도 좋았다고 한다.

기형씨가 14살이 될 무렵에는 인견 사업의 벌이가 쏠쏠하다보니 가내 수공업하던 사람들이 기계를 늘려 공장 규모도 커졌다. 그 무렵 풍기 읍내는 우후죽순 공장이 들어섰고 밤낮으로 기계를 24시간 돌리니 골목으로 들어가면 베틀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읍내에 공장이 난립하면서 기계 소리로 인한 민원도 많아져 결국 농공단지를 추진하게 됐다.

당시 그는 생활이 어렵다 보니 ‘밥은 먹여줄 테니 와서 일해라’는 말에 10살쯤 누군가의 소개로 식당에 가서 심부름과 청소를 하며 몇 년을 지냈다고 한다. 60세가 넘어 고물 장사하던 아버지는 그가 18세가 될 때쯤 69세 나이로 작고했다.

독학으로 배운 한글, 수학

기형씨가 식당에서 일할 때 3살 터울인 형도 식당으로 갔다. 3살 아래인 여동생은 직물공장에서 일했다. 그때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 대부분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남녀 할 것 없이 일터로 가서 돈을 벌었다.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 조차 갈 수 없었던 그는 글을 모르니 눈치가 늘어났고, 심부름으로 다녔던 가게 이름을 기억하면서 한자씩 글을 배우고 쓰게 됐다. 학교를 다녀온 친구들이 외우던 구구단을 듣고 아버지가 가져온 국어, 산수 헌책들로 글과 계산법을 익히며 초등과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만큼 배움에 대한 절실함이 컸다.

풍기에서 평생의 인연 만나

복잡한 가정사로 집도 없어진 상황에 어려움이 더해진 기형씨는 풍기를 잠시 떠나 서울, 부산 등에서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했으나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폭언, 폭행 등으로 인해 도망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저곳의 공장을 다니며 모은 50만원은 머리를 다친 형의 치료비로 전부 들어갔다.

20살쯤 풍기에 다시 돌아온 기형씨는 서울에서 내려온 여동생의 방도 얻어주고 공장에도 다닐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주위에 사는 대부분이 공장에서 베를 짜거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다들 가족처럼 지냈다. 그리고 기형씨가 사는 집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공장의 직수하는 직원이 기형씨를 눈 여겨 봤는지 자신의 질녀를 소개했고, 1년여간 연애를 하다가 27세에 결혼했다.

그 무렵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던 형이 식당을 개업했다. 여동생은 구미로 가서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했고 이후 강릉에서 살았으나 갑자기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여동생을 회상하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생만 하다가 24살의 아까운 나이에 명을 달리한 동생이 불쌍하고 애처로워 한참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결혼사진
결혼사진

풍기인견 산업과 제조 공정

옛날 직기로 인견을 만들 때는 하루 24시간 밤낮으로 일해도 원단의 생산량이 적었다. 그러나 1년 내내 원단을 짰고, 소량이지만 원단이 전량 판매되다가 보니 인견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그전에는 실타래로 나왔어요. 과정이 많이 복잡했죠. 풀도 이렇게 끓이고 적셔서 말려 작은 물레에다가 걸어서 깡통에 감아요. 옛날에는 손 나름이라고 기계가 없었어요. 원단의 폭 넓이가 27인치부터 105인치까지 있는데 그 쓰임새에 따라 다르고, 원단 두께도 아주 얇은 게 있고 덜 두꺼운 게 있고, 아주 두꺼운 게 있고, 그걸 맞춰주는 게 나름 하는 과정이에요”

지금은 원사가 들어오면 사이징(sizing)해 빔에 담고 원하는 본수에 폭을 맞춰서 직기공장으로 이송해주면 원단을 생산한다. 옛날에는 공정이 지금보다 3가지 과정이 더 많았다.

“제가 처음 들어갔던 곳은 사촌 형님이 서부동에서 공장을 시작했다가 나중에 성내교회 쪽으로 이사했는데 대략 10년여간 일을 했죠. 거기서 일을 배워 마름사로 올라가 있다가 다른 공장에서 일도 하고요”

삼화직물에서만 17년째 근무하고 있는 기형씨가 마름 공정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마름은 원사를 가져와서 첫 단계 준비 과정으로, 다양한 원단을 요구사항에 맞춘다. 실 굵기에 따라서 용도의 쓰임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직물 경기가 없는 요즈음 점차 문을 닫아 마름하는 곳이 두 곳 남았었으나 최근에는 풍기에서 혼자 남게 됐다고 했다.

“원단으로 따지면 지금 해주는 게 한 20가지 정도는 하는 것 같아요. 원단 폭과 두께 이런 거를 맞춰서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해주거든요. 원사에서 물레에 가는 과정이 당김이 같아야 되잖아요. 조그마한 고리 추가 다섯 개가 달려 있는데 어떤 거는 당김이 너무 심하다 이러면 추 하나를 위로 걸어주고, 그걸로 조정을 하죠. 실이 700개가 나갈 때 힘을 일정하게 받아야지 한 개라도 더 당기거나 늘어지거나 이러면 원단 바닥이 이쁘게 안 나와요. 굉장히 민감하죠”

그는 마지막 남은 정경사로서 인견이 풍기에 존재하는 한은 누구라도 그 명맥을 이어가기를 바란다는 점도 강조했다.

삼화직물 공장 내부
삼화직물 공장 내부(인견실 작업 사진모습)

인견의 특성과 인견 정경

인견은 봄, 여름이 성수기이지만 준비나 재료 생산은 가을, 겨울, 봄까지 이뤄진다. 이 때문에 기형씨는 여름이 조용하고 나머지 계절은 바쁘게 보낸다고 했다. 일이 바쁠 때는 새벽에 나와 밤늦은 시간까지 기계를 쉼 없이 돌린다. 지금도 풍기에서는 구직기가 돌아가고 있다. 하루 24시간을 작업하면 보통 60~70야드를 짜는데 자동직기는 이 보다 5~6배 가량을 더 짤 수 있다.

인견사에 대해 그는 원단이 두껍기도 하고 얇기도 한데 아주 얇은 원단은 75데니아로 예전에 많이 했고, 요즘은 주로 제품에 적합한 120데니아를 쓰고 있다고 했다.

“이제껏 47년간 인견만 만졌기 때문에 딴 원사나 원단이나 이런 거는 크게 관심 둘 일도 없었어요. 인견 전문 기계이기 때문에 딴 원사를 가지고 하려면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폴리에스테르나 이런 거는 전부 대구 쪽에서 해서 가지고 올라오죠. 예전에는 대구에 가면 물레의 공정이 물레에 감는 게 아니고 빔에 바로 작업하는 완사이징을 하는데 엄청 커요. 풍기도 전에 한 공장이 있었는데 하다가 접었죠”

정경사, 누군가 이어가길

자신은 4년간 배운 정경사 일을 이제는 과정이 단순해지기 때문에 집중해 배운다면 1년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후임자를 키우고 싶어도 희망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군가를 선택해 배우라고 권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내가 원래 60세 전에는 한 60세까지만 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때가 되니까 70세까지도 할 것 같아요. 그때 가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예전에는 (정경사가) 많았죠”

올해로 그는 결혼 40주년이 됐다. 1남 1녀를 낳고 아내와 함께 열심히 살아가면서 집과 땅을 마련했을 때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부모의 사랑으로 자란 자녀들은 책 보는 것을 좋아하던 딸이 현재 교사로, 운동을 좋아하던 아들은 IT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이기형씨는 은퇴하게 되면 우리나라 곳곳을 다녀보는 것이 바람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면 후회는 없다는 그는 “정경사로 오래 일해 오면서 그걸로 인해 가정을 잘 이끌어 왔고, 아이들을 키우고 했기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며 “지금의 바람은 건강하고 아무런 탈 없이 생활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정리 배준우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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