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의 대표적인 지역산업으로 ‘풍기인견’ 명맥 이어져야”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정감록 따라 십승지 찾아온 3세대 경영인

인견발전협의회장 맡아 인견산업 이끌어

 

인견 제조업의 기반 다지며 활용성 높이고

직물 용도와 쓰임새 맞게 다변화 시키기도

 (주)풍기인견편직_송종명 대표
(주)풍기인견편직_송종명 대표
시민오케스트라 활동 (송대표_가운데)
시민오케스트라 활동 (송대표_가운데)

“우연히 인견니트라는 원단을 보게 됐어요. 인견이 니트와 접목이 되면, 굉장히 획기적이란 생각에 3일동안 잠을 못 잤는데, 4일째 되는 날 ‘그럼 내가 한번 하면 되지’하고 2010년 인견 니트기계 한 대를 놓고 시작하게 됐죠”

영주시 풍기읍에서 태어난 송종명(56) ㈜풍기인견편직 대표는 평안남도 박천평야에서 지주였던 조부모와 가족이 1945년 광복되고, 남한으로 내려온 후 풍기에 정착하게 되면서 3대째 풍기인견사업으로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2014년부터 2022년까지 (사)풍기인견발전협의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풍기인견산업의 발전을 위해 활동했으며, 2018년부터 2022년까지는 한국섬유개발원 감사로 활동해 왔다.

조부모의 월남, 인견사업의 창립 배경

평안도 박천군은 송 대표 아버지의 고향으로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곳이다. 1905년 청일전쟁 때 환란을 겪으며 피해를 입은 후 1910년 쯤 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은 더 큰 환란을 피하기 위해 정감록에 나와 있는 피난처 중 제1승지인 풍기로 자녀들을 먼저 이주시켰다.

박천평야의 지주였던 송 대표의 할아버지는 1945년 광복이 된 후 배를 한 척 사서 가족들을 모두 남쪽으로 보냈다. 이때 집에 잠시 들린 작은할아버지도 함께 내려왔으며, 남으로 이동할 때는 주간에는 숨어 있다가 야간에 조금씩 움직여 인천으로 들어와 2~3년 서울에 머물다 전운이 감돌자 가족 모두가 풍기로 내려왔다. 당시 명주 세 필을 가지고 내려온 할아버지는 한 필을 팔아 집을 사고, 또 한 필로 나무를 사고, 남은 한 필로 식량을 샀다고 한다.

“양잠이 잘되는 지역이 있는데 당시에 풍기도 양잠을 했대요. 그래서 북에서 양잠을 했던 할머니가 여기에서 누에고치를 했어요. 샀던 나무로 수직기를 만들어 길쌈을 하고 고모들이 베를 짜면 할머니가 내다 팔고 했어요”

(주)풍기인견편직의 변천사와 신념

1945년부터 가내수공업으로 직물을 짜던 송 대표의 할아버지는 1950년 전후 인조견을 만들다 1965년 ‘박능직물’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공장이나 공단이 없던 당시에는 주거지역에서 직물이 짜면서 북이 탁하고 치는 소리가 크고 오랫동안 들리니 여름에 문을 열어 놓고 베를 짜면 소음으로 인해 문으로 돌도 날라오고 심한 말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고기도 끊어다 드리면서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고.

이후 박능직물은 아버지가 이어 운영하다 송 대표가 고2 때 돌아가신 후에는 송 대표의 형이 맡았고 이어 연사를 제작하게 되면서 1992년 준비공장으로 ‘홍익연사’를 세웠다. 박능직물에서 총무를 맡아 연사를 주로 맡던 송 대표는 1998년 ‘명신섬유’로 사업자를 내고 연사를 중심으로 한 공장을 직접 운영하게 됐으며, 지금까지 ㈜풍기인견편직도 함께 하고 있다.

“1993년 섬유를 시작해서 12년 정도 직물을 했는데 인견이 이불로는 값어치가 있는데 옷으로는 신축성이 없어 고민이 많았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견니트라는 원단을 접하게 됐죠. 3일 동안 잠을 못자고 고민하다 짜보자는 생각으로 포천에 가서 인견니트 짜는 기계 1대를 구입해 시작했죠”

그는 인견직물이 펄프가 원료이기 때문에 신축성이 좀 떨어지지만 시원하고 통풍이 잘돼 피부에는 좋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했다. 이에 직물은 직물대로 좋은 용도와 쓰임새가 있고, 니트는 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기에 풍기인견의 다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재 ㈜풍기인견편직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인견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으로 세탁했을 때의 축류를 안정시키고 신축성을 더 가미하면서 인견의 냉감성은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5~10% 화학섬유를 섞어 강도를 올려 고유성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해 가고 있다.

마케팅과 유통망의 경우는 매장에 ODM방식으로 판매하면서 도매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소매는 서울 강남 뉴코아백화점과 현대그린푸드 H-Mart Event(현대아산병원점) 입점해 판매도 한 바 있다. 송 대표는 “생산하는 것의 40% 정도는 원단으로 팔고 60%는 풍기 쪽 매장에 판매하는 형태”라며 “좋은 물건을 만들어 판매자에게 넘겨 잘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했다.

직원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하루를 시작하는 송 대표. 그의 하루는 인견으로 시작해 인견으로 마무리된다. 시즌 기간인 5~8월이 지나면 비시즌 기간에는 디자인, 샘플작업, 소재개발 등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소재나 공법을 알아가기 위해 전시회나 매장을 둘러보면서 트렌드를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해외전시장 부스 모습
해외전시장 부스 모습
인도네시아 히잡 영업차 방문  
인도네시아 히잡 영업차 방문  

풍기인견의 명품화를 위해

풍기인견은 풍기에서 생산된 원단만 풍기인견이라 칭할 수 있다. 2007년 (사)풍기인견발전협의회가 구성된 후에는 인조원사 공동구매와 부자재 공동구매를 했으며, 풍기인견에 대한 품질관리도 협의회에서 하고 있다.

2012년에는 풍기에서 생산된 원단만 ‘풍기인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 등록을 했다. 이후 공동생산, 공동판매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려움이 뒤따라 함께하는 공동체이자 경쟁관계로 좀 더 발전적인 모습을 이어가게 됐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사)풍기인견발전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해온 송 대표는 협의회의 목표가 풍기인견명품화 사업으로 매월 첫째주 금요일 이사회, 10월 임시총회, 매년 1월 정기총회를 통해 소통하면서 서로 아이디어도 교환한다고 했다.

송 대표는 풍기인견의 장점에 대해 “제가 많이 하는 말이 ‘한 번도 안 입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입은 사람은 없다’는 말인데 몰라서 못 입지, 입으면 재구매율이 높다”며 “인견은 계속 통풍이 되기 때문에 시원하다. 면 런닝이나 팬티를 입으면 땀이 나서 수분이 남아 세균이 배양돼 냄새가 나지만 인견은 날려버리기 때문에 젖었다가 말라도 냄새가 안 난다. 인견이 면보다는 청량감이 더 좋다는 얘기”라고 했다.

이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인견홍보판매 행사를 하면 서울 사람들이 풍기인견이 좋다고 많이 구매해 가는 것에 용기와 힘을 많이 얻었다”며 “풍기에서 제조했던 제품들을 여기(풍기)에서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살아 구매력이 높기 때문에 대도시 쪽으로 진출해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송 대표는 중국의 원사 메이커공장의 초대로 중국에 출장을 다녀왔다. 4년 전에 비해 현장 설비가 좀 더 자동화되고, 작업조건이 좋아진 것을 살펴봤다. 원진레이온이 폐쇄된 이후로는 한국에서 원사생산이 안 되고 있어 원사를 100%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원사는 수입할 때 컨테이너 베이스로 하게 되면, 20ft, 40ft가 있는데, 20ft만 해도 아마 한 1억원 정도 가까이 되기 때문에, 대량으로 주문을 못해 풍기직물조합이 컨테이너 베이스로 사다 놓고 조합원들한테 소량씩 판매하기도 했어요. 저희 경우는 1995년 당시에 중국에서 바로 수입했습니다”

대량으로 수입한 원사는 개인 업체들이 소량으로 구매하고 한 달 생산량이 소비되면 또다시 3개월에 한번씩 수입하고 있지만, ㈜풍기인견편직에서는 개별로 1년에 한 번 컨테이너 베이스로 바로 원사를 수입하고 있다.

힘든 시기 지난 지금이 전성기

송 대표는 1998년 IMF로 인해 환율이 오르면서 2~3억 정도의 환차손을 입었다. 1998년부터 2005년 사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2004년 모공장인 박능직물을 폐업하게 됐다. 어려운 과정에서도 노력해 섬유에 관한 지식도 습득하면서 사업의 발판을 다져나갔다고. 2008년까지 암울한 시기를 보낼 때는 ‘섬유를 해야 되나?’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고난의 시기에 2008년 (인견)니트를 접하고 제조업을 하게 되면서 2014, 2015년도부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왔고요. 지금이 제겐 전성기에요. 유행에 따르고, 기능성이 좋은 섬유를 개발해 앞으로도 계속 좋은 경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어 송 대표는 풍기인견이 당면한 시급 과제로 인력 수급 문제를 꼽았다. 인건비 상승에 일할 수 있는 젊은 층이 없어 계절 이주여성들을 연계해 한시적으로나마 인력난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길 희망했다.

또 풍기인견산업이 기능성 섬유가 많이 나와 조금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를 해결해 가기 위해서는 2차 원단생산이 발전돼야 한다고 했다. 2차 제조업보다는 옷을 만들어 판매하는 3차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많아 인견발전을 위해서는 새롭고 좋은 원단을 많이 개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종명 대표는 마지막으로 “냉정하게 제조업을 경영하고 참여하려면 생산공정을 알고 체험해 봐야 하는데 ‘이 공정을 할 수 있을까, ‘자식대에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만,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어가는 좋은 산업이 되었으면 한다”며 “원사를 사서 그걸로 뭔가 제품을 만든다는 자체가 굉장히 신기하고 보람도 느낀다.

이렇게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조상 때부터 해오던 제조업이 기반이 돼 그분들이 오랫동안 고생해온 것이기에 풍기인견이 앞으로도 영주의 대표적인 지역산업으로 명맥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 김신영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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