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인견 고급화와 젊은 세대 즐겨 입는 제품 만들어 가다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가내수공업에서 근화직물, 동명직물로 확장

쉬지 않는 노력으로 만들어 가는 인견 제품

동명인견 김정현 대표
동명인견 김정현 대표

“잠자는 시간을 빼고 일할 때도 무언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재미있었어요. 인견은 나에게 직업이자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풍기읍에서 태어난 김정현(40) 동명인견 대표는 영남대학교에서 섬유학을 전공했다. 근화직물과 동명직물을 운영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동명인견(동명인견사랑) 대표를 맡고 있는 인견 3세대다.

현재 (사)풍기인견발전협의회 감사를 맡고 있으며, 풍기인견의 고급화와 젊은 세대도 즐겨 입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젊은 경영인이다.

놀이터였던 풍기인견공장

김 대표가 태어난 1983년, 당시에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은 작은 규모에 베틀이 6대 정도의 가내수공업으로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일을 배워갔다.

8살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풍기에서 봉현농공단지로 이사했다. 살림집과 공장이 같이 있어 직원들과 함께 밥도 먹고, 언제나 창고와 공장이 김 대표가 뛰어노는 놀이터였다.

그렇게 원사가 감겨 있는 빔이 의자가 되고, 원사를 싸는 종이는 장난감이었다고. 또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과 손잡고 가서 물고기 잡고, 아버지의 오토바이 타고 죽령을 넘어 놀러 다녔던 일들, 청소년기에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부석사나 영주 시내를 오고 가던 기억도 남아있다.

김대표 어린시절 
김대표 어린시절 
할머니와 소백산 등반했던 모습
할머니와 소백산 등반했던 모습

“할아버지가 산을 좋아하셔서 할머니와 함께 소백산에 가서 사진도 찍고 했어요. 한 번 갔다 오면 용돈으로 2천원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클수록 안 가니까 용돈도 5천원까지 올랐고 그러면서 많이 다녔어요. 할아버지가 조합에 계시면서 조합분들이랑, 마음 맞는 분들이랑 비로봉 비석도 큰 걸로 세웠고, 그래서 더 많이 갔던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인견 옷을 입고 자란 김 대표는 당시에 나염이 안 된 하얀 원단을 빨아 할머니와 고모들이 만들어준 인견 파자마, 바지, 잠옷 등을 입고 생활할 만큼 인견은 일상이 됐다.

섬유학 전공, 인견업 이어가

청주의 한 대학에 입학했던 김 대표는 고민 끝에 다시 영남대학교 섬유과에 들어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갈 결심을 했다. 방학 때는 집에 와서 공장과 사무실을 오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론보다 공장에서 쓰는 용어들을 물어보고 배웠다. 2006년부터 인견매장을 시작한 후에는 매장 일도 도왔다.

본인과 아버지의 건강문제로 대학졸업 후 공장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일에 대한 재미를 느낀 김 대표는 일찍 자리를 잡았기에 결혼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이 고향인 아내를 만나 2남1녀를 뒀으며 현재 아내는 바쁜 여름철에는 인견매장의 일을 돕고 있다.

2023년 '동명인견' 매장 입구 모습
2023년 '동명인견' 매장 입구 모습
매장 내부에 인견 옷들이 진열되어 있다
매장 내부에 인견 옷들이 진열되어 있다

근화직물과 동명직물

60년이 넘은 동명인견은 창업주인 할아버지 고(故) 김석근 씨로부터 시작됐다. 중학생 때 서울서 공부하던 중 전쟁이 났다는 말에 고향인 풍기까지 걸어와 생활하던 중 당시 실향민으로 풍기에 정착한 아내를 만나 19세에 결혼해 다섯 남매를 낳았다.

김 대표는 할아버지를 가정적이고 따뜻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와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니셨다고. 또 일에 대해서는 완벽을 추구했던 할아버지는 농공단지로 옮겨가면서 공장 기계 대수도 늘려 30대가 넘었고, 근화직물이 운영이 잘 돼 동명직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아버지가 ‘동명직물’을 운영하실 당시에는 과감한 투자로 생산량이 6배 차이가 나는 에어제트직기를 6대를 들여놓았고 이후 12대까지로 늘렸다. 그러나 갑자기 섬유경기가 좋아 않아 힘든 시기가 있었다. 이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장도 경영난으로 근화직물을 정리해야 했다.

이후 동명직물과 동명인견을 운영하였는데 김 대표가 이어받게 됐을 때는 무리가 있어 현실적인 선택으로 동명인견만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당시에 ‘근본을 버리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슬픔이 컸다고 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제직기술은 이후 옷과 이불로 만들어졌다. 주부로 있던 김 대표의 어머니는 2006년 ‘이형풍기인견’을 설립해 센스 있는 디자인 등으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해 공장의 단칸방 같은 매장은 순식간에 성장해 갔다.

“할아버지가 풍기직물조합장도 하셨는데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어요. 자수성가하셔서 이렇게까지 일구시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시고 그랬죠. 그런데 제가 와서 일을 해보니까 할아버지랑 일을 배우면서 부딪치기도 했어요.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법이었거든요. 유일하게 대드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와 일에 있어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가족이 함께한 많은 시간을 아버지가 여러 장의 사진으로 남겨 놓아 소중하고 특별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랬기에 할아버지는 손자가 직기를 다루는 등 공장에서 여러 일을 해오다 가업을 승계 받았을 때 무척 기뻐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좋은 추억도 많이 주시고 그런 영향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왜 이렇게 게으르지?’라고 이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제가 할아버지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고,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저도 모르게 아내와 자녀들 데리고 산에 올라가요”

드론으로 촬영된 '동명인견' 전경
드론으로 촬영된 '동명인견' 전경

함께 하며 배우게 된 경영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수금을 다녔다고 한다. 공장은 놀이터고 생활의 터전이다 보니 ‘철크덕 철크덕’ 기계 소리가 안 들리면 이상할 정도였다. 초창기에는 명절에도 계속 기계를 돌렸으나 섬유경기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세우는 시간이 늘어나 공단 전체가 조용해지면 을씨년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기름과 실이 뭉치면서 나오는 기름 냄새는 어릴 때부터 맡고 커서 그런지 아직도 맡으면 너무 좋아요. 지금은 추억인데, 그때는 기계 소리가 없으면 세상이 이상할 거 같았어요. 원단이 잘 팔려나갈 때는 3교대씩 했으니...”

동명인견에는 경기를 타든 안타든 오래전부터 이곳을 찾은 고정 고객들이 제품을 찾는다. 김 대표는 그런 고객들이 있기에 보람을 느끼고 대를 이어 한다는 데 의미도 부여돼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된다고 했다.

동명인견은 한 시즌에 보통 100여 가지 아이템이 나온다. 이불부터 속옷, 잡화류, 양말, 스카프, 내의 등 종류별로 다양하다. 디자인적인 부분도 패턴을 수정해 만들면서 노하우도 쌓여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동명인견은 김 대표와 그의 어머니가 공동대표로 여동생과 아내, 직원 5명이 일하며 올해도 지난해 9월부터 기획하고 디자인한 원단에 나염을 찍고 가공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새로운 준비, 풍기인견의 미래

디자인에 대해서 발로 뛰며 다양한 정보를 얻는다는 김 대표. 디자이너와 함께 논의해 출시한 ‘에몬다 집업후드’는 화려한 색감으로 인기를 얻으며 완판이 됐다.

한 디자인에 보통 500장, 자신 있는 제품은 1천장을 만드는데 이는 10만 야드의 기적이라고 했다. 최근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 중인 김 대표는 40대 전후의 연령대도 입을 수 있을 정도의 디자인과 색감을 구상하고 있다.

그는 풍기인견 사업에 대해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올인을 했지만, 일할 때는 물론이고 무언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상황 자체가 즐거웠다”며 “풍기인견은 하나의 브랜드로 풍기에 있는 업체들이 같이 노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면 지속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풍기인견의 고급화를 위해 노력하는 김 대표는 풍기인견이 일반 다른 원단에 비해 염색하는 난이도가 높아 처음에는 염색공장에서 염색하기 힘들어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인견이 대중화가 되면서 수요가 늘어나고, 기술발달과 가공법이 생겨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해내고 있다.

김정현 대표는 “지금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어 내년에는 소개가 될 수 있는데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누가 봐도 ‘어, 이거는 괜찮네?’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그런 브랜드를 만들어 기존에 하던 제품들과 함께 더 잘해나가고 싶다”며 “풍기인견은 직업이자 여력이 되는 한 계속해 나가야하는 동반자 같은 관계다. 일하면서 정말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은데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상황만 된다면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 홍애련 생활사기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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