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인견의 체계적인 산업발전에 기반을 다지다

올해 영주문화원은 ‘풍기인견, 실향민의 절실함이 지어낸 선물’이라는 주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추진하는 ‘2023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의 가치 있는 이야기를 주민들의 생애사를 통해 알아보고 이를 기록해 의미 있는 자료로 활용, 홍보하기 위함이다. 이에 본지는 영주문화원과 공동으로 풍기인견의 다양한 분야에서 생업과 경제활동을 하는 전현직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봉현농공단지·영주지방산업단지 조성 앞장

지역주민 위한 배드민턴 활성화에도 이바지

김형동 전 풍기직물조합장
김형동 전 풍기직물조합장

“앞으로 풍기직물 공장을 하려면 ‘주거지역에서는 세월이 흐르면 못 한다’, ‘산업단지로 나가야 된다’고 사람들을 설득했지요”

김형동 전 동신직물 대표는 인견 제조공장을 운영하면서 1983년 풍기직물조합의 조합장을 지내며 봉현농공단지와 영주지방산업단지를 조성해 풍기인견이 체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봉현농공단지협회장과 풍기지방산업단지 추진회장을 역임하면서도 인견 생산인들은 물론 지역민들의 여가와 건강한 생활을 위해 배드민턴 경북연합회를 만들고 초대 연합회장을 맡아 영주지역의 배드민턴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지난 7월 17일과 8월 7일 풍기인견홍보전시관에서 이뤄진 구술면담을 통해 김형동 전 동신직물 대표에게 오늘날 풍기인견이 발전하게 된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청소년기 생활과 군입대

1940년생인 김형동 전 풍기직물조합장은 강원도 울진에서 태어나 16세에 단산면 병산리가 고향인 부모님을 따라 풍기로 왔다. 풍기에서 서당을 다니다 원주에 사는 누나에게 가서 살면서 신문배달을 하며 야간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지만 힘든 생활로 인해 졸업은 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21세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생활하던 중 이듬해인 1962년 군에 입대해 7사단 포병연대에서 근무하다 1965년 4월에 제대했다. 군대생활 중에는 첫째 딸이 태어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김 대표는 딸이 태어난 날이 우리나라 화폐개혁이 된 날(1962년 6월 10일)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딸이 태어나고 당시 영주중부국민학교 앞에서 조그만한 구멍가게를 했는데 가게가 잘 안 되잖아요. 아내가 혼자서 고생을 많이 했죠. 군대에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직업 하사관을 신청했다가 내가 군대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제대를 했어요”

제대 후 풍기인견 시작

김 조합장이 제대하고 풍기에 정착한 후에 그의 아내는 집에서 수직기를 시작했다. 수직기를 하려면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먼저 원사를 일본에서 수입해 그 실로 타래를 만들어 풀을 먹이고 말린 후 다시 해사기에다 끼우고 깡통에 감아 제직을 했다. 그 준비 작업을 그가 맡았다.

1969년에 족답기 6대로 시작해 1970년이 되면서 동력기로 차차 바뀌어 갔다. 수직기를 할 때는 땡땡이라는 것밖에는 제직할 수 없었고, 기계를 바꿔야 할 경우에만 다른 무늬를 짤 수 있었다고.

“그거는 안감이 안 돼요. 그래서 동력으로 해서 양복 안감을 제가 제직했죠. 1970년대 초 양복 안감으로 제직한 후 1976년부터 대구 서문시장에다 팔러 갔습니다. 그때는 가공을 대전서 합니다. 가공소가 대전에 하나밖에 없었어요. 대전서 가공해 대구에서 팔고 했어요”

대구에서 양복 안감을 판매했으나 도매상이 적어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했고, 1983년 서울로 향해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봉현농공단지·풍기직물단지 조성

서울에 거래처를 확보한 그해 2월, 그는 풍기직물조합장으로 선출되고 ‘소신껏 하겠다’고 다짐했다.

풍기직물조합은 정확하게 ‘경북견직물조합 풍기분사무소’로 1969년 풍기에도 조합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 형성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조합원은 45명 정도였다. 김 조합장도 1969년 족답기로 처음 공장을 시작하면서 조합원에 등록했다. 당시만 해도 풍기직물조합은 50개 업체 이상이 되면 독립 조합을 만들 수 있었지만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할 수 없었다. 독립 조합을 만들면 인견사를 바로 구입해 판매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해 경북견직물조합 풍기분사무소로 운영됐다. 경북견직물조합에서는 매달 한사람의 인건비 정도를 지원하고 인견을 조합에서 구매해 팔고 수수료를 받아 조합 운영비에 보탰다.

이후 김 조합장은 1987년 2층 건물을 사들여 풍기직물조합을 운영했다. 특히 그가 조합장으로 한 일 중에는 봉현농공단지 조성이 있다. 주거 지역 내에 직물공장이 많았던 당시에는 초가삼간을 헐고 기계를 넣는 직물공장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민원이 조금씩 생겼다고 김 조합장은 회상했다. 그전에는 서로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니 이웃에서 소리가 나도 참고 했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난 후에는 민원이 생겨났다.

“당시 영풍군수에게 현재 실정이 이러하니 공단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했죠. 그 당시 시에서 장수농공단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전국 시도에 하나씩만 허가가 나는 상태였기에 어떻게 해야할까 하다 특별 농공단지로 신청을 했죠”

이때 들어선 것이 현재의 봉현농공단지이다. 당시만 해도 농공단지로 이전하면 다 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김 조합장은 직물업체를 찾아 다니며 설득해 22개 업체가 3만2천평의 땅에 들어서게 됐다. 1990년 3월까지 조합장을 맡은 그가 이룬 결과물이다.

그가 조합장에서 물러난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정부에서는 전국에 무허가, 임의 용도변경한 창고나 식당 등에 대한 단전단수 조치 명령이 내려졌다. 그 당시만 해도 풍기지역 100여개 직물공장 중 정식 허가를 받은 공장은 42개 밖에 안 됐다. 농공단지도 2개를 신청한 상태로 추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김 조합장은 경북도 내 지방산업단지가 없음을 알고 제안해 이름을 ‘풍기직물단지’로 결정하고 도청과 환경청, 건설부 등 곳곳을 찾아다녔고 이후 1997년 완공될 수 있었다.

 

동신직물의 발전과정

1969년 공장을 짓고 족답기 6대로 동신직물을 시작한 김 조합장. 동력으로 바꾼 후 1972년 정식 사업자를 내고 땡땡이 무늬에서 다양한 무늬가 들어간 제품을 생산했다.

“공장을 하다가 1976년부터 가공을 해서 대구 서문시장에 팔기 시작했는데, 서울서 전부 다 지방으로 물건을 팔지, 대구서는 도매상이 적고 한 건해야 경북, 부산, 마산, 이 지역 밖에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기계를 또 바꾸고 그렇게 하다가 농공단지를 만들면서, 안감을 짜기 시작했어요”

1990년에 들어서부터 몇 년 동안 북으로 짜는 아세테이트를 하다, 자동기계 물로 짜는 폴리에스터를 제작하고 1994년부터 워터제트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바람으로 날려 짜는 에어제트도 36대를 구비해 원단을 제작하고 있다.

현재 동신직물은 대학교에 다니며 아버지를 돕기 시작한 김 조합장의 아들이 2012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김 조합장은 “워터제트 기계를 10억 대출로 들여놨을 당시에 IMF가 와서 고충이 많았다”며 “750원하던 달러가 1천500원으로 배가 된 상황에 돈을 갚아야 했기에 은행 곳곳을 찾아다니며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역과 함께해온 일들

김 조합장은 풍기지역민이자 풍기직물조합 산우회 회원으로 회원들과 협력해 지역을 위한 일에도 함께했다. 바로 영주 소백산 비로봉에 표석을 세우는 일이다.

“등산하면서 보니 소백산 비로봉에 표석이 없어요. 전국에 다니면 표석이 제법 큰 게 많은데, 비로봉에는 없어서 우리가 한번 시작해보자 했죠. 그렇게 당시 100만원 주고 세울 돌을 사고, 죽계계곡에서 방석 돌을 구하고, 석재공장에 부탁해 유명한 지역학자가 글을 써서 표석을 만들었지요”

무거운 표석을 소백산 비로봉에 올리기 위해서는 육군을 통해 대민지원사업으로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얻어 헬기를 지원받아야 했다. 105억의 헬기값에, 50명이 탑승해야 했기에 이를 위한 인명과 재산 피해에 대한 각서도 썼다고. 그렇게 1993년 10월에 표석을 올리려고 기단에 글씨도 새겼으나 이동의 문제로 4개월 뒤인 1994년 2월 24일 경기도 이천 육군301항공대대의 헬기로 영주 소백산 비로봉에 표석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김 조합장은 경북지역 배드민턴 연합회를 최초로 만들었다. 1994년 삼용화섬에서 지은 3층 공장에서 시작한 배드민턴 모임은 이후 초등학교 체육관으로 옮겨 운영됐다. 그 당시만 해도 체육관을 사용하지 못하거나 빌려야 했기에 경상북도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타 지역의 활용사례를 살펴본 후 기관단체장을 찾아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동호회 활성화와 대회 추진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인견사업의 미래에 대해

김 조합장은 수출의 어려움과 지속적인 경기의 어려움을 걱정했다. 좋지 않았던 중국제품도 이제는 잘 만들어져 나오고 인건비와 전기요금, 원자재 상승에도 원단값은 오르지 않고 있는 데다 가격 경쟁에도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다.

“인견이 잘 돼야 해요. 조합 운영도 진퇴양난이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조합에서 파는 인견을 사지 않고 전부 개개인이 다른 데서 거래하니까요. 지금 조합, 협의회, 협동조합 이렇게 전부 갈라져 있어요. 뭉쳐야 사는데 전부 제각각이에요”

김형동 전 풍기직물조합장은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 봉현농공단지와 영주지방산업단지을 만든 일이 가장 큰 보람을 다가오기에 풍기인견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다. 그저 이번 기회를 통해 풍기인견과 누구도 하지 않은 일들을 전할 자리가 마련돼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생활기록가 김도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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