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세상] 자원 봉사로 제2의 삶 사는 중국어 강사 정성애씨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 차이로 힘들었어요. 다행히 남편이 자상하게 설명해주고 잘 대해줘서 잘 극복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정성애씨(39)는 중국 길림성이 고향인 이주여성이다.

우리지역에도 수년 전부터 이주여성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다른 언어와 다른 생활습관 등으로 인해 정씨처럼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보람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할아버지 고향이 경남 거창이라고 들었어요. 일제시대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만주로 이주해오셨어요. 제가 교포 3세입니다.” 정성애씨는 한국으로 이주해 오기 전 길림성에서 5년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아버지께서 중학교 교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교사 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 덕분에 대우를 받으면서 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로 시집을 오니까 저는 그냥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 중국에서 시집온 여자일 뿐이더라고요, 어쩌면 그래서 더 적응해 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정성애씨는 지난 1995년 12월 중국을 떠나 한국에 왔다. “수산 가공업을 하는 남편이 일 때문에 사업하시는 몇 분들이랑 같이 중국엘 왔어요. 그런데 우연찮게 제가 통역을 맡게 되면서 가깝게 됐어요. 뭐 그래서 시집을 오게 됐죠.”라며 미소 짓는다.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영주시청을 찾는 중국인들의 통역을 하는 일이었다. 자매결연 등 교류가 확대되면서 우리지역을 찾는 중국인들이 많아져 무척 바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2002년부터 시청 통역도 하고 경북전문대학도 나가고 일을 많이 했어요. 일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참 좋구나 라고 생각을 했어요.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해주니까요. 또 사람들이 참 열정적이예요. 친절하고- 처음엔 오해도 많이 했어요. ‘이 사람이 나 한 테 왜 이러나. 뭘 바라나?’ 하고요.”

정성애씨는 요즘 너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행복하다. 오랜 세월 동안 발휘(?)해 온 유창한 통역 실력을 인정받아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북전문대학 국제교류협력센타 강의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있고 월요일과 수요일 두 차례 여성회관에서 중국어 강의를 한다. 그뿐 아니라 2002년부터 시작한 시청 직원들의 중국어 고급반 그룹지도가 일주일에 두 번 야간 강좌로 하고 있단다.

“살림도 하죠. 처음에는 젓갈, 김치, 청국장 등이 먹기도 힘들고 요리도 못하고 했는데 지금은 잘 먹어요. 요리도 잘하죠. 벌써 10년 이상 했는데요. 우리 형님도 ‘김치 하나는 잘 담근다’며 제가 담근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하세요. 그리고 이제는 중국 가서도 한 3일 있으면 김치와 된장찌개 생각이 절로 난다니까요.” 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 민족이다.

지난해에도 배추 서른 포기로 김치를 담궈 김치 냉장고에 가득 채워놓고 그녀의 김치솜씨를 아는 지인들에게 퍼 돌렸다는 그녀가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진다.

“여기 와서 참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자원봉사’였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너무 좋고 너무 좋은 말이예요. 중국은 ‘자원봉사’라는 말 자체가 없어요.”라는 그녀는 지난 여름 아이들 방학에 맞춰 중국엘 다녀왔다고 한다.

“일 년에 한번씩은 중국에 가요.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니까요. 가까운 친척들도 있고 해서요. 그런데 갈 때마다 북경, 청도. 서안 등 중국에 유명한 도시들을 갔다가 집이 있는 길림성엘 가요. 중국 사람들보다 저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이 중국 곳곳을 더 많이 다녀서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정성애씨는 더 얘기 하고 싶지만 또 4시에 수업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2005년에 결혼한 임노국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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