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둘러앉아 각자의 포부를 얘기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공자가 4명의 제자를 둘러앉히고 “자신의 덕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았다면 어찌하겠냐” 물으니, 자로는 ‘3년 안에 굶주림을 없이 하고, 백성들이 모두 도(道)를 알도록 깨우치겠다’ 하였고, 염유는 ‘고작 60리 정도의 땅만을 다스리면 여한이 없겠다’ 하였고, 공서화는 ‘종묘의 일과 제후들의 모임에 예복과 예관 차림으로 보좌하는 작은 벼슬이나 맡아 보겠다’ 하였는데,

이후 공자가 “점아, 너는 어찌하겠느냐?”라고 물으니 타던 연주를 잠시 그친 증점이 비파를 한 번 굵게 긁고는 그것을 내려놓으면서, “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을 한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으로 기수(沂水)에서 목욕(沐浴)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風] 쐬고, 노래[詠]하며 돌아오[歸]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께서 찬탄하며 말씀하시기를 “나도 점과 뜻을 같이한다”라고 하셨다.」

이후 이 일화에서 유래된 영귀정(詠歸亭), 영귀루(詠歸樓), 풍영대(風詠臺), 독영귀(獨泳歸), 호호대(乎乎臺), 욕기단(浴沂壇), 무우정(舞雩亭) 등 누정 이름을 비롯한 수많은 바위 글씨와 지명에서 광범위하게 인용되면서 증점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조선조 문인 서거정(徐居正)이 여말선초 각계에서 떠돌던 해학적인 기문과 일화를 엮은 우스개 이야기책인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에 의하면, 어느 날 삼봉(三峯), 도은(陶隱), 양촌(陽村)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한담을 나누던 중 ‘평생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는 평생지락(平生至樂) 이야기’를 하나씩 하기로 했다.

먼저 삼봉(三峯)이 말하기를, “첫눈 내리는 날 담비 모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준마(駿馬) 위에 올라앉아 아득한 들판을 호쾌하게 내달리며 사냥하는 재미, 이것이야말로 사나이의 평생 즐거움 아니겠소?” 하니,

이에 도은(陶隱)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정갈한 산방(山房) 한 칸을 빌려 밝은 창 아래 놓인 깔끔한 책상 한 켠에다 향불을 피우고 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다리며 좋은 시구(詩句)를 주고받는 것이 천하의 즐거움이 아니겠는지요?” 하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양촌(陽村)이, “흰 눈이 뜰에 소복 쌓이고 밝은 햇빛이 창에 화사할 제 따스한 온돌방에 둘러쳐진 병풍 앞에 화로를 끼고 앉았다가 책 한 권 손에 잡아 벌렁 드러누웠을 때, 아름다운 여인이 섬섬옥수로 수를 놓다가 잠시 바늘을 멈추고 화롯불에 밤을 구워 입에 넣어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참 즐거움이 아닐까요?” 하니, 이에 삼봉과 도은이 “옳거니 바로 그거야” 하며 박장대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우스개를 전제한 것이기에 여기에 등장하는 삼봉(三峯), 도은(陶隱), 양촌(陽村)이 실재의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이라는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고금소총에서 따온 가공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이야기 속에 담긴 내용은, 역성혁명의 주인공답게 야성(野性)이 살아있는 정도전, 세속을 떠난 선가(禪家)의 기품이 느껴지는 이숭인, 그리고 권문세가로써 부와 명예를 누린 권근, 이렇게 이색(李穡) 문인 세 사람의 실제 성격을 적확하게 찔러주는 멋들어진 풍자여서 자못 진(眞)과 농(弄)을 구분해내기 어려울 정도의 완벽한 구성이라는 평이다.

이렇듯 격조를 갖춘 선조들의 농익은 농담에서 새삼 삶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난다.

증점이나 양촌이 쉬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엉뚱한 정답으로 엉뚱한 공감을 유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즈음 학생들처럼 선비들에게도 자신들을 옥죄는 학문의 스트레스가 매우 빡빡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픈 심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증점식의 초월과 양촌식의 외침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공자가 꿈꾸는 세상도 이런 소박한 소망이 이뤄지는 단순한 세상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