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3월도 중순이다. 완연한 봄기운이 돈다. 벌써 남녘에는 봄꽃 축제가 한창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필자가 거주하는 순흥의 작분원(灼蕡園)에도 홍매(紅梅)와 청매(靑梅)가 벙글기 시작했다. 음력(陰曆)으로는 오늘이 2월하고도 초 아흐레이니 이른바 중춘(仲春)이다. 사람들은 이제 나무를 심거나 꽃구경하면서 본격적으로 봄을 맞이하여 즐기려 하고 있다.

한편 사람들은 따뜻한 봄에 꽃샘추위가 잦을 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많이들 말한다. 분명 봄은 왔건만 봄과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따뜻한 봄이 아닐 때만 쓰는 말일까? 현재는 실제로 따뜻하지 않은 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상식처럼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한두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 다수가 말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증좌(證左)가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어디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또 생각 밖으로 많지 않은 듯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이 말은 바로 당(唐)나라의 동방규(東方虬)란 시인이 지은 「상화가사.왕소군(相和歌辭.王昭君)」 삼수(三首)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의 승구(承句)에서 유래하였다. 참고로 작품 전문(全文)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漢道方全盛(한도방전성) 한나라 도가 바야흐로 전성기여서

朝廷足武臣(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신들로 넘쳐났다네.

何須薄命妾(하수박명첩) 어찌 모름지기 운명이 기박한 첩을 시켜

辛苦事和親(신고사화친) 괴롭게도 화친을 일삼게 했는고?

 

掩涕辭丹鳳(엄루사단봉) 눈물을 감추고 한나라 단봉궐을 하직하고

銜悲向白龍(함비향백룡) 슬픔 머금은 채 흉노의 백룡퇴로 떠났네.

單于浪驚喜(선우랑경희) 선우는 부질없이 놀라고 기뻐할 테지만

無復舊時容(무부구시용) 다시 옛날의 아름다운 얼굴은 없다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되의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은 찾아왔건만 봄과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입은 옷의 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허리를 날씬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네.

 

원래 이 시는 왕소군(王昭君:BC54-BC19)이라는 한나라 궁녀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소재로 하여 지어졌다. 소군(昭君)은 왕장(王嬙)의 자(字)로 훗날 진(晉)나라 때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으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또한 빼어난 미모 덕에 뽑혀서 궁녀가 된 후 화가(畫家) 모연수(毛延壽)의 농간(弄奸)으로 흉노(匈奴)에게 가게 된 비운(悲運)의 인물이기도 하다.

동방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영사시(詠史詩)를 읊었는데 영사시는 그 갈래의 특성상 다목적(多目的)으로 쓰인 시이다.

첫째는 중국인들이 언제나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흉노와 친하게 지내려는 화친의 조건으로 한나라 궁녀를 보내는 일에서 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시에서는 명시적(明示的)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넌지시 흉노에게 보내는 궁녀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자행되었던 각종 비리 사건으로 왕소군이 선발되어 가는 내막(內幕)을 폭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의 옛시인들이 즐겨 쓰는 수법으로 당시 언론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군주주의 시대에 자기 황제나 지배층을 직접 비판할 수 없으므로 다른 왕조 시대에 벌어졌던 일을 가지고 와서 자기 황제나 지배층의 잘못을 비판하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이 있다. 이런 수법이 적용된 전형적인 작품이 바로 백낙천(白樂天)이 지은 「장한가(長恨歌)」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작품 탄생 배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구절만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 한나라 시대에 있었던 사실과 당나라 시인이 노래한 작품을 몰라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 구절을 사용할 때 이 구절이 유래하게 된 저간(這間)의 사정을 안다면 덤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봄이 오면 봄처럼 되도록 우리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지를 못하다는 데 있다. 자연환경이야 인간의 힘으로 인위적인 조작이 어려울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성 있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인문환경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조성할 수가 있다고 본다.

공정(公正)과 상식(常識)에서 동떨어진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문제라고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不感症)에서 우리 사회가 헤어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마치 물에 담긴 개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물의 온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익어서 죽는 것과 같은 일이 현재 우리 곁에 와 있어도 실제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꽃샘추위가 잦아서 봄과 같지 않은 봄이야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봄과 같지 않은 세상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필요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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