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중 시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조선 중기에 활동한 걸출한 학자이자 문학가이며 교육자였다. 그는 문과 급제를 통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조정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서원을 창설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학을 통해 관학을 보완하며, 유학 교육을 실현하여 세상을 정신적으로 구제하는 일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우리나라 학술사는 물론이고 유학 사상의 발전과 교육제도의 확립 등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이다.

김장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愼齋 周世鵬 硏究」의 서론 첫 부분을 그대로 적었다. 영주는 신재 선생의 은혜를 많이 입고도 현대에까지 소수서원 배향 외에는 추모사업이 없어서 영주시민의 한 사람으로 선생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논문을 준비했다고 한다. 논문을 읽는 내내 이런 애정 어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백운동서원 창설 과정에 신재 선생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 본다.

논문을 읽는 동안 백운동서원을 창설하는 과정에 폐허가 된 숙수사 빈터에서 고독한 사색을 하고 있던 신재 선생의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중앙에는 성균관이 있고, 지방에는 향교가 있는데 새로운 사학 교육기관으로 서원을 세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이 풍기군수로 임명되었을 당시에 향교는 거의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으나 백운동서원 창건에 있어서는 풍기지역 유림의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이 사묘(祠廟)에 향사할 인물로 안향을 선정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헌공은 우리 동쪽 나라 도학(道學)의 시조입니다. 그 가르침은 단번에 우리나라의 비루함을 싹 씻었습니다. 그 이후 240년 동안에, 천리가 밝아지고 글을 숭상하는 기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이 누구의 힘입니까?” 선생은 안향을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김부식보다도 동방 성리학의 비조(鼻祖)로서 공맹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로 생각하고 추증하였으나 모든 학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서원 창설에 정성을 기울였다. “관아에 부임한 지 3일도 안 되어 죽계(竹溪)를 방문하였습니다. 순흥부의 옛날 성과 떨어진 정도가 소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위치에 폐허가 된 숙수사 절터가 있었습니다. 늘 흰 구름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에, 감히 그 골짜기 이름을 백운동(白雲洞)이라고 했습니다. 왔다갔다하다가 느낌이 일어나서 비로소 사당을 세울 뜻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서원 최초의 백운동서원이 건립되었다. 신재 선생은 제례 의식에 사용할 <도동곡(道東曲)>을 지었다. “삼한 천만년에 진유(眞儒)를 내리시니/ 소백산이 여산이요/ 죽계수가 염수(濂水)로다/ 학교를 일으키고 도를 보호함은/ 작은 일이겠지만/ 주자를 높이 모신 그 공이 크시도다/ 아, 우리나라에도 도가 전하여졌으니/ 그 광경이 어떠한고” 이렇게 해서 안향과 주자, 백운동서원과 백록동서원, 소백산과 여산, 죽계와 염수의 대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과 중국이 대응을 이루게 된 것이다.

향교를 대신할 사학인 서원을 세우는 데는 많은 유림의 저항이 있었다. 안향 선생을 성리학의 비조로 세우는 데도 당대 학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서원을 세울 때쯤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고 어려웠다. 그러나 서원을 세워 후학을 교육하는 일은 빈민을 구제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다는 선생의 설득에 서원 창설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함께 뜻을 모으게 되었다.

소수서원에는 신재 선생의 고독한 여정이 들어 있다. 그 고독함으로 인해서 회헌 안향 선생은 우리 역사 속에 걸출한 유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영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 지식인의 고독이 폐허가 된 숙수사 옛터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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