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都城) 축조 공사는 농한기를 이용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원이 동원됐다.

태조 5년(1396) 1월부터 도성 공사가 시작됐다.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49일간 진행된 1차 공사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와 청천강 이남 지역, 함주(함흥) 이남 지역 등에서 11만 8700명이 동원됐다. 또 농사일이 끝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간 20만 명을 동원한 2차 도성 축조 공사가 진행됐다. 도성 공사는 도성 내 사산(四山)인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는 총연장 5만 9500자(약 18km)에 달하는 대역사였다.

정도전은 지형을 고려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축조법을 지향했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았고 높은 곳은 12m나 됐다. 한양 도성 건설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특징은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시장과 민가, 학교와 사당을 조성하여 최소한의 공적 건물과 공적 기능만으로 구획했다.

조선의 궁궐은 고려에 비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장중한 자태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점포의 크기를 제한하고 대신들의 저택도 40칸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숙석(熟石, 석공이 잘 다듬은 돌) 같은 사치품의 사용을 금하는 등 절제된 도시를 조성했다.

정도전은 한양 조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궐이 사치스러우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국가 재정에 손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너무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위엄을 보여줄 수 없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한 것은 덕이 되지만, 사치스러운 것은 악이 되는 것이니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해야 한다.”

정도전은 한양을 조성하면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 철학을 철저하게 따랐고, 태조는 그 공로를 치하하며 정도전을 “유학의 으뜸이요, 나라를 세우는 공도 으뜸”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고 칭찬했다.

정도전은 한양 건설을 축하하기 위해「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태조에게 바치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병풍을 만들어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다음은 경복궁 조성 후에 지은 「도성궁원(都城宮苑)」이라는 시이다.

“성은 높고 쇠처럼 튼튼하며 천 길이나 되었도다. 구름이 둘렀으니 봉래산을 에워싸던 오운이라. 해마다 궁궐 뜰엔 꾀고리와 온갖 꽃들이 가득하니, 대대로 도성에서 사람들이 놀면서 즐기리라.”

돌이켜 보면 당시 국력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경복궁의 화려한 모습과 52방 마을들이 화려하고 평화롭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가 정도전이 이방원의 손에 변을 당하기 넉 달 전이었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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