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천도(遷都)는 국가의 수도를 옮기는 것으로 앞 시대와 단절을 고하고 새롭게 건설된 도시에서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한양 천도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한다. 무학대사가 삼각산에서 한양을 내려다보고 “한강 줄기가 곧지 못해 도성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질 우려가 있으니 치마를 뜯어 강물에 띄워 보내면 이러한 기운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한양 천도와 관련해서 대신들 사이에도 이견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근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도 무성했다. 이러는 동안 태조 2년(1393) 8월 태조는 남경 즉 한양의 옛 궁궐에서 산세를 살펴보고 무학대사와 중신들의 의견을 듣고 난 후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하게 된다. 천도가 결정되자 정도전은 한양 도성의 범위를 정하는 등 도시 설계를 만들어 태조에게 바쳤고, 유교 교리에 기반해 새로운 수도 건설에 앞장선 것이다.

정도전은 한양을 인구 10만의 도시로 설계하면서 『주례(周禮)』의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나오는 국도(國都)의 조형(造營) 원리를 참고한 것으로 전한다.

「동관고공기」에 따르면 국도는 전조후시(前朝後市)라 해서 궁궐의 앞쪽에 관청을 세우고, 시가지를 조성했다. 그리고 좌묘우사(左廟後社)라 해서 종묘는 궁궐 좌측에 사직단은 우측에 세워 궁궐을 중심으로 도심을 설계했다.

정도전은 「동관고공기」를 참고해 한양을 건설하면서 지형과 산세를 함께 고려했다. 자연경관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산과 강과 언덕과 내는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과 인간의 생활 터전을 조화시키는 한양을 건설했다.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은 궁궐을 도심 한복판에 두지 않고,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밑에 정궁인 경복궁을 두었다. 그리고 동쪽에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서쪽에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는 사직단을 조성하면서 경복궁은 정남향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15도가량 기울어지게 배치했다.

광화문에서 현재의 교보문고 좌측에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들어가고, 맞은편인 현재의 종합청사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에는 예조·중추부·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같은 높이와 규격의 지붕으로 조성됐다. 광화문 남쪽에 육조거리인 태평로를 닦아 육조와 삼군부를 비롯한 중앙 관청들이 들어서게 했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를 연결하는 종로거리를 만들었다.

현재 보신각 자리에 있던 종루에서 남대문까지의 곡선 대로인 남대문 거리를 조성하여 오늘날 서울의 중심도로인 태평로·종로와 함께 한양의 3대 도로망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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