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초기부터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에 근거해 개경 이외에도 여러 곳에 궁궐을 조성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2년(壬申) 7월 17일(丙申) 태조(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아 태조는 “새 도읍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계속 거주하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개경(개성) 인근에는 고려의 역대 왕릉 등 고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정치 투쟁 과정에서 뿌려진 피비린내와 500년 동안 특권적 공간에서 안착된 고려의 구세력들과 개성의 민심도 마음의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천도(遷都)설이 나오자 민간에서는 만두소를 만들 듯 고기를 칼로 난도질하며 분풀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측간 즉 화장실을 서각(西閣)으로 부르면서 국왕이 집무를 보던 서각에 비유하여 ‘구린내가 난다’는 조롱 담긴 소문이 퍼져 나가기도 했다. 또한 민생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천도에 반대하는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 정도전은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전조의 뒤를 이어 처음으로 즉위하여 백성들이 소생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위로 천시(天時)를 살피고 아래로 인사(人事)를 보아 적당한 때를 기다려서 도읍 터를 보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며, 조선의 왕업이 무궁하고 신(臣)의 자손도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정도전은 민생부터 챙길 것을 건의했지만, 태조는 물러서지 않고 새 도읍지를 찾는 일을 독촉했다. 태조 2년(1393) 1월 2일 권중화(權仲和, 1322∼1408) 등이 계룡산이 수도로 적합하다는 보고를 올리자 태조는 1월 18일 직접 그곳으로 떠났다.

계룡산의 지세를 살펴본 태조는 김주(金湊, 1339∼1404)·박영충(朴永忠, 미상)·최칠석(崔七夕, ?~1394) 등을 남겨 신도 건설을 감독하게 했다. 계룡산 공사가 한참 진행될 무렵 경기도 관찰사 하륜이 말하기를 “계룡산은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지리상 물이 빠져나가는 장생혈(長生穴)이라 수도를 세우면 당대에 큰 화를 면치못하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공사 중단을 건의했다. 결국 공사는 10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계룡산 천도는 백지화됐다. 그러나 천도 자체가 백지화된 것은 아니었다.

태조는 풍수지리 연구 기관인 서운관(書雲觀)의 서적들을 연구하여 새 후보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내렸고, 하륜은 무악(毋岳)을 추천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뱃길이 통하며, 우리나라 사람의 비결(祕訣)과 부합되는 바가 많고, 중국의 여러 풍수 책의 설명도 모두 비슷하게 들어 맞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무악은 안산(鞍山)을 말하며, 현재 서울 신촌과 연희동 일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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