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후 세계적으로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이는 정도전의 민본위민(民本爲民) 사상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왕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를 꿈꾼 세기의 혁명가로 손색이 없다.

500년 왕국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그의 외교 정책이었다. 사대주의 외교로 비판받는 정도전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 정책은 “군사 강대국 사이에 끼인 우리 민족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고려해 백성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게 근현대 학자들의 해명이다.

조선은 태조가 즉위(1392.7.17)한 다음 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10월 22일 명나라에 갔던 조반(趙胖, 1341∼1401) 등이 귀국했으며, 3일 후인 10월 25일 정도전이 황제에게 신년 인사를 올리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된다. 조선이 개국한 지 4개월 만인 1392년 11월 29일 예문관 학사 한상질(韓尙質, ?∼1400, 한명회의 할아버지)을 명나라로 보내 국호의 재가를 청하면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가지 안을 올렸다.

화령은 지금의 함흥 지역으로 이성계의 고향이다. 왕의 고향을 국호로 정한 것은 전례가 없었지만, 조선과 함께 첨부한 것은 황제의 선택을 청하는 예우 차원이었다. 이듬해 2월 한상질이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 돌아옴으로써 새로운 왕조의 이름이 조선으로 결정됐다.

『삼봉집』「조선경국전 上」 ‘2. 국호(國號) 편’에 “해동(海東)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한 것이 세 번 있었는데,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그리고 위만(衛滿)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적 정통성과 팔조법금(八條法禁)이라는 윤리 문명 그리고 정전제(井田制)라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실시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중국의 요순시대와 출발이 비슷하고,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갖추었다는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고려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원천석(元天錫, 1330∼?)도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지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였다니 생각건대 천자(天子)께서 동방을 중히 여기시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그 이치 정당하구나 기자가 남긴 풍속 장차 다시 떨쳐 일어나면 마땅히 여러 나라 다투어 빛을 보러 오리

조선이란 국호 사용은 태조 2년(1393) 2월 15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역사적인 정통성과 자부심이 담겨있는 ‘조선’이란 국호는 누가 지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개국초기에 모든 문물제도가 정도전에게서 나왔고, 『조선경국전』에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정도전이 지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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