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머슴 생활도 하고 구두닦이 등 고학으로 박사, 교수에 이르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최근 세계 태권도 고단자 승단 심사평가 위원장 선임

권용학 선생님, 김호기 선생님..어릴 적 스승 만난 게 행운

장기 계획 세워 실천 습관, 새 계획은 몇 달 동안 유럽 걷기

묵은 세배차 초등 담임선생님(권용학 전 순흥향교 전교.전 금성단 단장)을 뵙고(22.12.14)
묵은 세배차 초등 담임선생님(권용학 전 순흥향교 전교.전 금성단 단장)을 뵙고(22.12.14)

경남태권도협회 행정부회장 김신호 박사는 순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공부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부자집 일을 해주는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업어 돌보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장작 만들고 알갈비(소나무 낙엽)를 긁어 내다 팔아 돈도 벌어야 했다.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에는 부자집 머슴 생활도 했다. 1년이 2년으로 이어진 머슴 생활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저녁에는 태권도를 수련했다. 그런 그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구두도 닦았다. 고학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학력인정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난 주엔 한국태권도신문에 그의 일생이 <김신호 사범 “소년 머슴에서 박사, 그리고 교수되다”>란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김박사와의 인터뷰는 그의 개인적 이야기에 그치기보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나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한 세대의 성장사 기록이기도 하다.

한국태권도신문에 김 박사님 이야기가 실렸던데요.

아이고 아이고 아 벌써 30년 40년 전의 일을... 김학수 전교육장이 제 이야기를 기자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저는 저를 홍보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없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요. 김 교육장이 제대로 기록을 하셨던데요.

김 교육장님과는 40년 지기로 제 이야기를 이미 좀 아셨고 순흥 태권도 수련장 제명비 행사 때 참가자들과 순흥초등학교에 들르고, 옛날 태권도 수련장(한무관) 자리인 현 순흥교회 앞 떡방앗간에도 들르고, 도서관 가 보고 금성단 가보며 주변 분들이 하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게 ‘참 어렵게 살았었구나’라 하시더니 그걸 기록하셔서... 저는 좀 민망했습니다.

경남 태권도 유단자 어르신들과 함께
경남 태권도 유단자 어르신들과 함께

요즘 많이 바쁘시지요?

어째 계속 바쁜 팔자입니다. 고향 말로 일정이 ‘수두룩 빽빽’ 입니다. 지난 목요일 서울에서 태권도 평가위원 70~80명 만났구요. 경남태권도협회 이사회, 각 지역 시군 회장 모임, 대의원 총회, 그리고 강의...제주 사업 일도 있고..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경남 태권도협회 도장 수가 800개가 넘습니다. 맡은 직책을 제대로 못 하면 욕 먹습니다. 저는 제대로 못할 일은 내려놓습니다. 최근 직책 2개를 반납했습니다. 남들은 안 시켜준다고 난리인데 반납하는 사람 처음 본다고 이야기들을 하셔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어릴 적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꿈을 가지고 꿈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 하셨습니다. 제가 그 입장이었다면 포기했을 수도 있을텐데... 지금도 꿈을 갖고 노력하시니 대단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계획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책상에 계획표를 보이게 두고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길게는 15년, 20년... 지금은 7년, 5년, 3년으로 줄었습니다(함께 웃음). 저는 좀 낙관적인 편입니다. 국내 체육학과 졸업생의 진로 문제 걱정이 높을 때 제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걱정할 일이 아니다. 태권도도 저변이 넓어져 나중에는 각 대학의 이름을 걸고 도장을 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은 전국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측은 하더라도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다릅니다. 남다른 노력을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저도 15년 계획을 짜고 밤낮으로 게획표를 보면서 이행하려 했습니다. 노력하면 100% 달성은 못해도 70%는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했습니다.

'2023 제주올레길' 축제시
'2023 제주올레길' 축제시

지금 갖고 계신 계획 중 중요한 것 하나만 소개해 주시지요.

걸어서 유럽을 완주하려 합니다. 태권도 관련으로 유럽을 여러 번 갔지만 사색의 걸음을 못했습니다. 3개월 정도 꼬박 걸으려 합니다. 책도 쓰고 있습니다. 올해 중 3권을 내려고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제주 올레길도 있고 김호기 선생님과 약속한 출판도 그 속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역경을 헤치고 성장한 분들에게 오르막길만 있는 걸로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자리 잡았다고 여겨지는 시기에도 우여곡절이 있잖아요.

어떤 일을 맡으면 기쁘잖아요. 그만둘 땐 섭섭하다는 걸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때로는 추월당하기도 합니다. 저는 때로는 과감히 그만두었습니다. 때로는 먼저 승진한 후배에게 꽃을 보냈습니다. 산은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지요. 직을 맡긴 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임기 4년 직책을 반만 하고 내려온 단체도 있습니다. 그 바람에 그게 전통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국기원에서 큰 역할을 맡으셨다구요?

지방에서는 5단까지만 심사합니다. 고단자인 6단부터 9단은 국기원에서 하는데 그 심사평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 고단자 심사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대상인 무거운 자리입니다. 지방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위원장을 맡았다고들 합니다.

엄청 힘들게 자란 고향, 혹시 고향에 대해 나쁜 추억은 없나요?

나쁜 추억도 물론 있지만 고향에서 태어나 자란 게 제 인생의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순흥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신작로 옆 찔레순 꺽어 먹고, 콩잎 깻잎 먹고, 수제비 먹고, 개구리 잡고 뱀 잡고 물고기 잡고 눈 오면 토끼 잡으러 다니던 그 정서가 저를 키웠다고 봅니다.

도시에서 자랐더라면 정서적으로 너무 메말랐을 겁니다. 순흥초등학교 6년을 비롯 고향에서의 제 삶의 여정이 지금 생각하면 제가 청년기에 꼭 가고 싶었던 서울대를 나온 것보다 더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선생님들이 지금의 인생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치셨다구요?

돈도 안 받고 태권도 지도하신 김호기 선생님, 순흥초등학교 담임이셨던 권용학 선생님이 제 인성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치셨습니다. 15살 때 가출 결심을 하고 권용학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저를 끌어안고 많이 우셨습니다. 저 보고 두 가지를 약속하라 하시더군요.

돈이 낙엽처럼 굴러다녀도 내 것이 아니면 줍지도 말라는 것과 제 꿈이 공부인 걸 아시고 그 꿈을 마칠 때까진 돌아오지 말라였습니다. 제가 청년기에 고향에 돌아와 태권도장을 열려하니 꿈을 포기하냐며 회초리를 치셨습니다. 권용학 선생님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중학교 과정도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반장도 했는데 이런 스승님들이 제겐 행운의 부적이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정규과정으로 마치지 않으셨잖아요. 그렇게 공부하셔서 사회에 큰 기여를 하시니 대단합니다.

그때는 살기가 참 힘든 시대이고 또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났으니까요. 학교를 반도 못 나갈 형편이었습니다. 검정고시 준비할 때 기초학력이 없어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를 반도 못 나갔거든요. 밤낮으로 시간만 나면 책을 붙들고 검정고시 준비를 했지만 수학은 안 되더라구요. 죽을 애를 먹었습니다. 수학을 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도 인간으로 안 보입니다. 신기해요(함께 웃음).

어릴 때 갈비(소나무 낙엽) 긁고 나무 베어 장작 만들어 파셨는데 나무를 베면 혼났던 시절이었겠군요.

장작을 지고 순흥 장터에 가서 팔아야 하는데 산간수가 제일 무서웠습니다. 걸리면 감옥에 간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차 불빛만 보이면 숨었다가 짐을 옮기곤 했지요. 당시 싸게 살려고 하는 아저씨 아지매들과의 실랑이도 생각납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닭은 저절로 크는 줄 알고 병아리를 사다 키웠는데 모이가 없어 모두 폐기 처분한 아픈 추억도 있습니다.

제주에 반정착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저는 걷기를 좋아합니다. 수행자처럼 걷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40일 걸었습니다. 몽골 올레길도 완주했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생기기 전부터 제주에 가면 제주를 걸었습니다. 남쪽이지만 한라산이 있어 눈이 옵니다. 순흥에서 눈 올 때 토끼 잡으러 다닌 추억도 느끼게 합니다.

몽골 올레길 완주를 하고(오른쪽 세번째_김신호박사)
몽골 올레길 완주를 하고(오른쪽 세번째_김신호박사)

지난 번 오셨을 때가 순흥 태권도수련장(한무관 지관)이 태권도 역사의 이정표임을 나타내는 행사였지요? 나이가 매우 젊었을 때부터 태권도를 가르치셨더군요.

제 고향 순흥은 제가 태권도를 어렸을 때부터 배운 곳이고 가르친 곳이기도 합니다. 군대를 방위로 마쳤는데 순흥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만 2년간 태권도를 제가 지도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 사범 경력이 매우 깁니다. 나이가 열살 많은 분들과 비슷합니다.

태권도를 어떻게 배우게 되셨는지요? 태권도 중심의 삶을 사시게 되었는데..

운명인 거 같습니다. 순흥 옆집에 아제 항렬 분이 계셨는데 혼자 가기 심심하다고 저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땐 태권도라 하지 않고 당수도 또는 공수도 이렇게 불렀지요. 도복이 없어서 밀가루 포대를 몇 개 이은 게 도복이었습니다.

도복에 밀가루 상표가 보였지요. 비가 오면 대련하다 도복에 발자국이 묻기도 했습니다. 도장 바닥이 흙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도복을 빨다가 도복에 난 발자국을 보고 충격에 목을 매려 하셨습니다. 어머니께 싹싹 빌고 도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제가 와서 깡패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 아제가 120키로 몸집에 체육행사를 하면 순흥대표선수였습니다. 그 아제가 겨울 내내 나무를 가끔 한 짐 져다 주었는데 제가 며칠 해야 할 땔감 수준이었지요.

밀가루 포대로 만든 도복... 지금 남아 있으면 가치가 크겠는데요.

그럼요. 그 도복이 지금 있으면 몇 억 대 나가요. 그런 도복으로 태권도 배운 사람들이 저 말고도 있을텐데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김신호 박사 프로필

- 순흥초등학교 졸업

-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인정, 고등학교 졸업 인정

- 동아대 체육학과, 경남대 대학원 (체육학박사)

- (현)경남태권도협회 행정부회장, 국기원 고단자 심사평가위원장(2024.1~)

- (현)경남대, 창신대 외래교수

- (현)제주올레길 안내사

- (전)해양대학교 교수

- (전)경남대학교 교수

- (전)창신대학교 교수

- (저서)태권도 관련 교본 다수

- (걷기)제주올레길 완주,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규슈올레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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