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감천 고상골에서 1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나 시작된 산골살이

영주시 봉현면 하촌2리 속칭 배골마을(왼쪽 2번째 파란지붕이 할머니 집)
영주시 봉현면 하촌2리 속칭 배골마을(왼쪽 2번째 파란지붕이 할머니 집)

10살 무렵부터 명 잣는 일과 누에 치는 일 익혀 부모님 도와드려

13살 때 야학에서 잘했던 공부, 반장까지 돼 선생님께 “차렷 경례”

봉현면 하촌2리 속칭 배골에 사는 박의남(朴懿男) 할머니는 갑진년 새해에 95세를 맞이했다. 할머니는 연세가 100세에 가까워 오지만 몸은 꼿꼿하고, 정신도 초롱초롱하며, 기억력은 신통하리만큼 또렷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의 산골살이 100년을 역사에 남기자”고 했다.

할머니는 1929년 일제강점기 중엽 예천군 감천면 대산마을에서 태어나 10살 무렵부터 명(무명실) 잣는 일을 배우고, 누에치기를 익혀 부모님 일을 도왔다. 그리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언니, 아주머니들과 함께 글을 배웠다.

15살이 되는 해에 가정 형편상 영주군 봉현면 하촌리로 옮겨 살게 됐다. 1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8살이 되던 해 가을 안정면 용산리 공주이씨 가문으로 가마 타고 시집을 가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21살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을 떠나 피난살이를 했고, 피난에서 돌아온 남편이 농사일을 하다 바윗돌이 무너지는 바람에 크게 다쳐 공산치하 병원으로 실려 간 후 행방불명이 됐다. 25살에서 28살이 되던 해까지 시부모님 두 분 3년 상을 치룬 후 배골로 돌아와 친정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살았다. 3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30 여리가 넘는 길을 상여로 이동하여 선산 아버지 곁에 모셨다. 상을 마치고 나서부터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나이 70이 되는 해까지 35년간 마을 일을 봤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를 겪고 6.25 피난살이를 했으며, 새마을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꿋꿋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산골여성 지도자였다. 할머니가 살아온 ‘산골살이 95년’을 더듬어 고난의 세대를 살아온 할머니 삶을 역사에 남겨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박의남 할머니의 고향

박의남 할머니의 고향은 예천군 감천면 대맥1동 대산마을이다. 대산마을은 예천군 감천면 행정복지센터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2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대산(大山) 마을은 해발 241m 한산(漢山)을 등지고 소쿠리 형상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옛날 고려 중엽 어느 때 단양우씨 일족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 이름을 한산(漢山)이라 불렀는데 이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살인 누명을 쓰게 되자 “마을 이름이 나빠서 화를 입었다”하여 대산(大山)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2023년 12월 24일 박의남 할머니와 할머니 이웃에 사는 김석태(75, 하촌2리)씨 그리고 기자는 예천군 감천면 소재 할머니의 고향마을을 찾아갔다. 할머니가 태어나 15살까지 살았다는 고향집은 대산마을에서도 뒷산 고개를 하나 더 넘어 ‘고상골’이란 곳이다. 고상골에 가보니 할머니의 고향은 산골 중에서도 더 깊은 산골이었다.

할머니는 고향집 마당 자리에 섰다. 할머니는 아득한 어린 시절 그때를 생각하면서 “이곳에 두 집이 있었고 저 건너편에 셋집이 살았다”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할머니 방 벽에 걸린 액자에는 남편 사진, 어머니 사진, 상장 등이 걸려 있다.
할머니 방 벽에 걸린 액자에는 남편 사진, 어머니 사진, 상장 등이 걸려 있다.
할머니가 벽에 걸린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가 벽에 걸린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29년 고상골에서 태어나

박의남 할머니 방 벽 상단에 걸린 액자(1969.4.5자 중앙훈련원 수료증, 민주공화당 박정희 총재)에 보면 1929년 1월 3일생으로 적혀있다. 그런데 주민등록상은 300213인 것으로 봐서 호적 등재가 실제보다 1년 늦은 것으로 확인됐다.

박 할머니는 “당시는 출산 생존율이 낮아 첫돌 때까지 살아남아야 호적에 올린 것으로 안다. 그 옛날엔 병원도 없고 산부인과는 더더욱 없었다. 자연 그대로 자연분만하였기 때문에 강인하게 태어나야만 살아남았고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의남은 1929년 1월 3일 어버지 박준항(밀양박씨)과 어머니 안발구(순흥안씨) 사이 1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딸 여섯을 낳고 아들을 낳았으니 참으로 귀한 남동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박 할머니 위로 언니가 셋이고 아래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가 있어 7남매가 고상골 산골에 살았다고 했다.

초가삼간 오두막집

“할머니가 살던 집이 어떤 모양이었냐?”고 여쭈었다. 할머니는 “예전에는 마을 전체가 초가집뿐이었다”면서 “초가삼간 오두막집은 벽이 두텁고 집이 낮아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토담 초가였다”고 했다. 고향집 그때 그 자리까지 왔건만 고향집은 흔적도 없고 낯선 비닐하우스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할머니 말씀 따라 집 모양을 그려보았다. 초가삼간은 방 둘 부엌 한 간의 집으로 방은 가로세로가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3.0×2.5m)의 크기인 반면 부엌은 비교적 넓었다고 한다.

“왜냐?”고 여쭈니 “비가 오면 부엌에서 농사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방에 비해 부엌이 넓었다”면서 “부엌에서 콩타작을 하기도 하고 깨를 터는 등 우천 시 마당 역할을 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우리집은 초가삼간 앞에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 큰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는 누에고치를 치는 잠실”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태어난 예천군 감천면 대맥1리 대산마을
할머니가 태어난 예천군 감천면 대맥1리 대산마을
할머니가 고상골 옛집 마당에서 초가삼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할머니가 고상골 옛집 마당에서 초가삼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소녀 박의남의 어린시절

박의남은 어려서부터 “똑똑하다” “영리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10살 무렵부터 명 잣는 일을 배워 어머니를 도왔고, 누에를 치는 아버지를 도와 누에 뽕을 주는 일과 누에 똥 가는 일을 척척해냈다. 일제강점기 시대 농촌 사람들의 생활은 원시적인 삶에서 겨우 벗어난 정도였고, 문화의 혜택은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 무렵 의식주 생활은 대부분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졌다. 가족과 이웃의 도움으로 집을 짓고, 가족들의 고사리 손길까지 모아야 1년 먹을 양식을 구했으며, 직접 명(무명)을 잣고 길삼을 하고 바느질을 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명을 잣는다”란 말의 뜻을 여쭈니 “‘잣는다’란 말은 실을 뽑는 과정을 말하는데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을 때는 실의 가장 끝(실마리)을 찾은 후 몇 가닥을 합쳐 실을 뽑아내면 명주실이 되고,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내면 무명이 된다. 이렇게 실을 잣고 뽑고 날고 매고 꾸리 감고 짜고 등등 과정을 거치면 옷감 나오는데 이 과정을 낄쌈이라고 한다. 그리고 옷감을 치수에 맞춰 재단하고 바느질을 해서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입었으니 참으로 어렵고 힘든 산골살이”라고 말했다.

감천 5일장 구경

소녀 박의남이 열두 살쯤 되었을 때(1941년) 어머니를 따라 난생처음 감천장 구경을 가게 됐다. 감천면 소재지인 포리와 대맥리 고상골과는 2km 남짓하여 지금은 2∼3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당시는 오솔길과 논둑길을 따라가다가 윙고개를 넘어야 했기에 1시간 이상 걸렸다.

가는 길에는 무명바지저고리에 흰두루마기를 입은 아저씨가 등짐을 지고 가는 모습과 흰 치마저고리에 곡식 자루를 이고 가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무명 몇 필을 머리에 이고 갔다. 장에 가보니 흰옷(무명옷)에 갓을 쓴 아저씨들이 제일 많고, 어머니와 같은 모습의 아주머니들도 섞여 있었다. 또 어머니를 따라온 아이들도 있었는데 모두 무명 바지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할머니께 “감천장 가서 뭘 팔고 뭘 샀느냐?”고 여쭈니 “그때는 팔 곡식은 없었고 어머니가 가지고 간 것은 길쌈으로 얻은 명 몇 필 가지고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장에서 사 온 것은 성냥, 비누, 호롱불 기름(석유), 문종이 등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지금은 산골 사람들도 전국 명승지 안 가본 곳이 없고, 외국 여행도 해마다 가지만 그 당시는 산골 사람들 중에는 ‘예천’ 구경도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할머니는 또 “그때 장에서 본 것 중에는 솜틀집(솜 타는 집), 고무신 땜질하는 기계, 난전 국수집 등이 있었다. 그날 어머니가 하얀 사탕을 한 개 사준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야학 반장이 되다

일제강점기 치하 감천면에 1935년 감천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학교교육이 시작됐으나 산골 마을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박의남은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대산 큰 마을에 사는 또래 어머니 한 분이 딸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가 댓돌 아래서 뒷글을 배워 한글을 익혔다.

그 무렵 대산마을에 야학(夜學)이 문을 열었다. 대산마을 출신 중 신학문을 익힌 선구자 몇 분이 야학을 열어 한글과 신지식을 가르쳤다. 야학이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 공부하는 학교라는 뜻이다.

박 할머니는 “그때 열서너 살쯤 됐는데 큰마을에서 야학이 열려 매일 매일 고개 넘어가서 열심히 공부했다”며 “야학에는 열 살 아이부터 30살 아주머니까지 배움에 동참하여 교실(잠실을 교실로 사용)에는 부녀자 30여 명이 모여 공부를 했다.

그때 선생님들이 나를 보고 ‘똑똑하고 책도 잘 읽고 산수도 잘 한다’고 하면서 ‘반장하라’ 했다. 반장은 공부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차렷’ ‘경례’를 했는데 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어. 지금 생각하니 그때 차렷 경례를 일본말로 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밀양박씨 집안 어르신들은 “의남이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문중을 일으킬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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