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풍기인견의 역사를 이어가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녀에 이르기까지 생업을 위해 대를 이어 간다는 것은 때론 당연하게, 때론 큰 결심이 필요하다. 우리 고장 영주에서 가업을 지켜가며 지역의 명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는 영주의 역사가 담겨있고 각각 쌓아온 전통이 있다. 본지는 현재를 살아가며 앞으로도 대를 이어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삼화직물 '소담비' 전경
삼화직물 '소담비' 전경

‘향토뿌리기업’이자 ‘백년가게’로 풍기인견 제조와 산업화

가족이 함께 어려움 이겨내며 노력과 열정으로 가업 이어

3대를 이어온 경상북도 지정 향토뿌리기업이자, 백년가게인 ‘삼화직물’을 보면 우리 고장 영주에서 시작된 풍기인견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풍기인견의 대표적인 업체 삼화직물 ‘소담비’의 차대영(52) 대표는 지난 1982년 작고한 삼화직물 창업주인 할아버지 차준헌 옹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사진에는 ‘단기 4286년 5월 20일’이라고 적혀있고 차 대표의 할아버지가 삼화직물을 창업한 직후 종업원들과 함께 초파일에 부석사를 찾아간 것을 알게 된다. 조부모와 부모에게 들은 여러 이야기가 당시 풍기인견의 역사를 말해주고 여직공들과 1953년 초파일에 다함께 부석사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은 사진은 삼화직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화직물 공장 내부
삼화직물 공장 내부

‘삼화직물’의 시작

삼화직물의 창업주인 차준헌 옹의 고향은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이다. 상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이북에서 명주 원단 유통과 명주공장을 운영했다. 사업을 하면서 만주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미리 전쟁 발발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6.25 전쟁 이전부터 풍기로의 정착을 계획하고 이북에서 풍기로 여러 차례 다녀간 후 가족들과 함께 내려왔다.

“할아버지가 여러 곳을 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때 당시 고위층들은 전쟁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봐요. ‘조금 있으면 공산화된다. 남한으로 내려가’하며 풍기, 강화도 등 몇 곳을 찍어주더래요. 그중에 풍기가 제일 좋다고 무조건 풍기를 물어서 찾아가라 하더래요”

그렇게 풍기를 찾아 내려온 차준헌 옹은 땅을 조금 사 놓은 후 다시 고향으로 와 가족들을 먼저 풍기로 이주토록 했다. 남북 교류도 있었고 자유롭게 왕래했던 때였다. 혹시 몰라 큰아들에게는 중요한 짐을 조그마하게 만들어 절대 벗지 말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도 말며 안에 뭐가 들었는지 가르쳐주지도 않고 몸에 단단히 감아서 옷을 입혀주었다고 한다.

자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오다 큰 키에 몸도 좋다 보니 인민군에게 붙들리고 도망치기를 여러 번으로, 아들에게는 무조건 풍기로 가라고 하면서 몸에 지닌 보따리는 벗지 말라고 당부했다. 큰아들인 故 차동일 대표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보름에 걸쳐 가족이 내려오고 다시 한 달 뒤에 차준헌 옹은 온갖 고초를 겪고 풍기에 도착한 후 지금의 서부냉면 옆에 정착해 족답기 한 대로 안감지를 만들기 시작해 기계 대수를 늘려 나갔다.

인견실
인견실

그때 당시 직공들과 차준헌 옹, 큰딸 등이 함께 부석사에서 찍은 사진은 삼화직물의 창업 시기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 사진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던 분이 저희 큰고모에요. 큰고모가 살아계시는데 그 고모가 1935년생인가 그러세요. 90세가 다 돼 가시거든요. 사진은 중학생 때로 이쪽 인근에서 갈 만한 데가 거기밖에 없었대요”

당시 차준헌 옹은 인견 외에도 시멘트 사업, 정미소, 운수업도 함께 하고 있었고 여러 대의 차를 가지고 있어 부석사로 이동할 때는 삼륜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 거침없는 성격에 사업능력이 뛰어난 그였지만 사업을 확장해 나가면서 돈을 벌어 땅을 사들이기보다는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차를 여러 대 사 모았다고.

손자인 차대영 대표는 7세 당시에 양복을 입고, 스포츠머리를 하고, 고무신을 신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오토바이를 타며 공장과 집을 오가신 할아버지, 항상 정갈한 모습에 반듯했던 할머니에 대한 모습과 할아버지 환갑잔치 날에 대한 기억 등을 전했다.

“할아버지는 사업하러 서울을 오가면 한 달씩 계셨대요. 그래서 신문물도 보시고 멋도 낼 줄 아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를 맨날 뒤에 태우시고 선글라스 끼고 다니셨으니 옛날 어른들 사이에서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죠”

이후 차준헌 옹이 운영한 삼화직물은 직공이 40~50명까지 늘어나 풍기역 앞 사업장과 풍기제일교회 앞에서 두 개의 공장을 운영했다. 인견 안감을 주로 만들며 사찰에서 쓰는 연꽃이나 연등을 핑크색과 초록색으로 염색해 조화를 만들어 글씨를 쓰는 것도 인기가 있었다. 기계가 귀하던 시절인데다 운수업과 정미소도 공장 옆에 함께해 규모가 크다보니 풍기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고.

삼화직물 차대영 대표
삼화직물 차대영 대표
부인 김진희씨
부인 김진희씨

풍기인견과 ‘희로애락’

1974년 삼화직물은 큰아들인 故 차동일 대표에게 가업이 승계됐다. 건국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여러 우여곡절로 힘든 시간을 보낸 그는 아버지를 떠나 가족들과 강원도 탄광지역에서 몇 년 동안 주류 유통업을 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은 자신과 맞지 않았고 열악했던 가정형편에 가족들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창업주의 손자인 차대영 대표는 강원도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형제자매 중에 나만 강원도에서 태어나 10세가 될 때까지 살았는데 허름한 집에 수도도 나오지 않아 공동수도에서 물을 뜨러 다니는 등 참 춥고 어렵게 살았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차동일)에 대해 “아버지의 성향이 사업가적인 마인드보다는 공직에 맞는 분이었다”며 “원리와 원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업을 하면서 어떤 술수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회상했다.

가족들과 다시 풍기로 온 후 차동일 대표는 풍기인견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80년대 인견이 호황이었던 당시에 과감하게 투자해 30여대의 반자동 기계로 교체했다. 수동 기계가 1인 1대를 맡았다면 반자동은 한 사람이 6대를 맡을 수 있었다고. 그러던 중 1988년을 기점으로 인견 업계는 점차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차동일 대표는 반자동 기계를 완전 자동으로 교체했다. 셔틀 체인지로 한 사람이 기계 15대에서 20대까지 관리를 할 수 있어 생산 등 여러 가지 면에서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언젠가 팔릴 것으로 생각된 원단은 창고에 쌓였다.

1993년 군대 전역한 아들은 집안을 위해 일단 인건비라도 줄여보겠다는 마음으로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거래처를 확장해 나가면서 5년여간 빚도 상당 부분 상환할 수 있게 됐으며 통장에 돈도 쌓여갔다. 차대영 대표는 “그때 일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며 “참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열심히 일하는 보람도 느낀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장기계는 멈추고 회사는 잠시 문을 닫게 됐다. 기계를 팔아 직원들의 월급을 챙겨주고 3년 만에 다시 문을 열게 됐을 때 직원들도 다시 돌아왔다.

아이의 분유값도 없을 만큼 어려움이 계속되자 차대영 대표는 돈을 벌기 위해 쇼핑백에 옷 몇 가지만 들고 서울로 향했다. 아내는 풍기에 남아 시아버지 옆에서 공장 일을 도맡았다. 그렇게 차 대표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자재공장을 다니고 샘플링 작업을 해 풍기로 보냈고 아내도 아이를 업고 시장을 다니며 원단과 제품을 만들어 팔아 점점 다시 안정화를 찾아갔다.

부인 김진희씨가 원단을 정리하고 있다
부인 김진희씨가 원단을 정리하고 있다

가업 유지, 새로운 터전

2008년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 대표는 다시 풍기로 와서 2009년부터 가업을 이어갔다. 그가 가정 먼저 한 일은 자금을 정리하고 기계를 일부 처분했으며 읍내 안에 있던 공장을 산업단지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가업을 이어 신규사업장으로 등록하면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할아버지,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삼화직물’을 지켰다.

“살면서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아 기대를 안 했어요. 2013년에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때 정말 ‘고생했어’라고 알아주는 느낌이었어요. 그해 장사가 얼마나 잘 됐냐면 매장 안에 사람이 꽉 찼었어요”

삼화직물은 홈쇼핑이나 인터넷 판매를 하지 않아도 도매업체들이 찾는 곳이다. 차대표는 생지, 염색을 담당하고 아내는 봉재를 전담한다. 각자가 맡은 분야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현재 전국에 거래처만 200곳이다. 봉재를 전담하는 업체 5곳은 20년째 거래하며 서로 상생하는 동반자로 신뢰를 쌓아왔다.

2011년부터 삼화직물은 소담스러운 비단이라는 뜻의 ‘소담비’라는 브랜드를 사용하며 이름을 더해 70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차대영 대표는 자신에게 풍기인견은 ‘희로애락’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높은 곳으로 올려주기 때문이란다. 건강에만 문제가 없으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저녁에 집 문을 열 때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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