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년 주세붕 풍기군수 인위적 최초재배
풍기 금계동 임실마을 개삼터 유래

풍기인삼 즉 나삼(羅蔘)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먼저 볼 수 있는데 서기 627년(신라 진평왕 49)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기록(夏六月遣使 大唐 朝貢)과 서기 723년 4월에 당에 인삼 등 방물을 보냈다는 기록(夏四月遣使入唐 獻果下馬一匹牛黃 人蔘...이하생략)이 있다.

또한 서기 734년(신라 성덕왕33)에는 당 현제에게 하정사를 보내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先時遣王姪 志廉 謝恩獻小馬兩匹狗三頭金五百兩銀二十兩布六十匹牛黃二十兩人蔘 二百斤... 이하생략)이 있어 신라시대 때 벌써 소백산에 산삼이 많이 자생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인삼을 최고의 영약으로 쳤던 중국의 문헌에는 삼국의 인삼 이름을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삼은 ‘고려삼’, 백제의 삼은 ‘백제삼’, 신라의 삼은 ‘신라삼(羅蔘-나삼)’으로 세분해 기록했다. 이중 고려삼과 백제삼은 ‘명의별록(名醫別錄)’, ‘약총결(藥總訣)’, ‘자도헌잡철(紫桃軒雜綴)’ 등에서 보인다.

영주의 소백산을 주산지로 하는 신라삼의 경우 특히 중국에서 그 명성이 매우 높아 송나라 문인 장식은 소동파(蘇東坡)의 집에 놀러갔다가 신라삼을 구경한 것만으로 ‘신라삼견참부(新羅蔘見參賦)’라는 시를 남겼고 또한 시인 양만리는 신라삼을 선물 받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謝羅蔘(사라삼)’이란 시를 읊기도 했다.

후대에는 산지와 지역에 따라 달리 부르기도 했는데 개성인삼을 송삼(松蔘), 풍기인삼을 영삼(嶺蔘), 경기인삼을 기삼(畿蔘), 금산인삼을 호삼(湖蔘)이라 했다고 한다.

▲개삼터 고유제: 풍기인삼축제는 개삼터 고유제로부터 시작된다. 개삼터 고유제는 풍기에서 처음 산삼종자를 심어 재배하던 금계리에서 인삼축제의 시작을 소백산 산신께 알리는 제례의식이다. 장소는 풍기향교 후원
▲개삼터 고유제: 풍기인삼축제는 개삼터 고유제로부터 시작된다. 개삼터 고유제는 풍기에서 처음 산삼종자를 심어 재배하던 금계리에서 인삼축제의 시작을 소백산 산신께 알리는 제례의식이다. 장소는 풍기향교 후원

▲ 가삼재배(家蔘栽培)의 시원지 풍기

지금과 같이 인삼을 재배하는 것을 ‘가삼재배’라고 하며 그 시원지(始原地)를 풍기지역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조공 등을 통해 중국에 알려진 인삼은 고려조와 조선시대에는 의무에 가까운 조공무역의 물품이 돼 버렸다.

이 때문에 산삼이 많이 나는 주산지의 백성들은 산삼공납으로 인한 고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고려말 우리고장 순흥 출신의 근재 안축 선생은 삼탄시(蔘歎詩)를 써 백성들의 고통을 표현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런 현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중종조 신재 주세붕이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하도록 해 그 수요를 충족하고자 했다.

1541년 주세붕 선생은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한 결과 본래부터 산삼이 많이 자생할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삼을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했다.

이때 산삼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 ‘개삼터’에 시험 재배한 것이 인삼재배 즉, 가삼재배(家蔘栽培)의 효시가 됐으며, 풍기군수로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거쳐 1551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해 개성지역에도 새로운 인삼재배법을 보급했다.

산삼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만큼 가삼재배의 기록은 문헌으로 남기기 어려워 고증은 미약하지만 1778년(선조 11) 이시진(李時眞)이 지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각종 의서(醫書)를 통해 방증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인삼사(人蔘史, 전 7권)’는 비록 조선총독부가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약 7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전국을 대상으로 한 현지조사와 인삼과 관련된 문서와 역사서를 총 망라해 만든 책으로 아직까지 그 보다 더 자세하고 체계적인 인삼 역사서가 없다.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은 일본인 이마무라 도모에 의해 편찬된 ‘인삼사(人蔘史)’는 정치편, 경제편, 재배편, 의약편, 잡기편, 휘공편, 사상편 등 총 7권으로 돼 있으며 이중 제4권 ‘재배편’의 기록에 ‘풍기가 재배기원으로 최고(豊基面 起源最古)’라고 기록돼 있다.

풍기의 인삼산업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뤘는데 1938년 9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動員된 五百婦女 曝陽下에 製蔘(동원된 오백부녀 폭양하에 제삼)’이란 제목으로 풍기인삼제조창의 풍경을 쓴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마을별로 인원을 정해 10명씩 조를 짜 백삼을 제조한 것과 인삼을 가공하는 모습, 일하는 사람들의 심리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으며 게재된 사진에는 ‘삼 말리는 처녀들’ 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특히 소제목 ‘여공은 인조견복을 곱게 입어 장관 일운(이룬) 풍기인삼제조창’에서 이 당시에 벌써 풍기인삼과 더불어 우리고장의 대표적 특산품인 풍기인견이 많이 생산됐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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