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의 창건과 무량수전 중수에 관한 기록들

부석사 무량수전(현재 모습)
부석사 무량수전(현재 모습)

부석사 창건과 관련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사 살피기
『송고승전』 「당신라국의상전」에 전하는 부석사 입지와 경유 내력
봉황산 부석사 개연기 묵서명에 기록된 무량수전 중건 기록 고찰

부석사(浮石寺)는 어느 때 가봐도 볼 때마다 그 맛이 다른 것 같고, 마주하는 발걸음마다 색다른 감회를 주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학교 공부가 시작된 이래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부석사’라고 배웠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은 부석사’라는 아름다운 절 1순위의 명성은 70년 역사 이래 한 번도 자리를 양보한 적이 없다.

최근(2022.10) 영주시 홈페이지에 “무량수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소개된 것을 보고, 안동시가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 목조건물”이라며 반박했다.

1914년 부석사의 모습
1914년 부석사의 모습

이 논란은 1916년 부석사 완전 해체 수리 때 개연기 묵서명에 ‘1376년에 법당이 개조됐다’는 기록과 1972년 봉정사 극락전 해체 공사를 진행할 때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을 중수했다’는 두 기록 비교에서 극락전이 13년 빠르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번 호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무량수전편」에서는 부석사의 창건과 무량수전의 중수 기록에 대해 기 학자들이 밝힌 내용들 중 우리가 잘 몰랐던 내용들을 살펴 요약 기술하고자 한다.

이원식 기자의 가족소풍(1961년 무량수전 앞)
이원식 기자의 가족소풍(1961년 무량수전 앞)

어릴 적 본 부석사

부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단산면 옥대리에 살았던 기자는 5세(1954년) 때 사월 초팔일(부처님 오신날) 부석사를 구경했으니 여느 사람들보다는 일찍이 부석사를 감상한 셈이다. 그날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법당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키가 작아 부처가 보이지 않자 외삼촌이 무등을 태워줘서 금빛 번쩍이는 부처를 처음 보았는데 ‘부처가 무지 크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2학년(1956년 2월) 때 이승만 대통령이 부석사를 방문하는 날은 50여 대의 승용차‧짚차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갔는데 흙먼지가 자욱했고, 호각 소리가 요란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다음 해 3학년 때는 부석사로 봄소풍을 갔는데 안양루 난간에 앉아 김밥을 먹었던 추억은 일생동안 자랑거리가 됐다. 그 뒤 중학생(1961)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집안 친척들과 걸어서 부석사에 가서 무량수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지금도 서랍을 열면 바로 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세계유산이 된 부석사는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기자는 지금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부석사 인근 단산에서 살았다”고 하면 “우와! 고향이 참 부럽네요”라고들 한다.

1916년 해체수리 때 가설덧집과 목재보관소
1916년 해체수리 때 가설덧집과 목재보관소

영주 부석사의 입지

의상이 왕명을 받고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닐 때 현 초암사 자리에 초막(草幕, 베이스캠프)을 치고 태백산 일대를 샅샅이 살폈다고 전한다. 의상은 봉황산 아래 절터를 정한 후 “이곳이야말로 고구려의 말발꿉과 백제의 눈보라를 막을 수 있는 천하명당”이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전하기도 한다.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조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이래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본산이었으며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末寺)이다.

부석사 창건과 관련된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서에서 ‘부석사는 태백산에 위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도 중 순흥부 지방도를 보면 백두산에서 발원한 지맥이 남으로 흘러 소백산에서 거대한 분출구를 이루고 또한 이 맥이 흘러 봉황산, 국망봉 등 소백 연봉을 맺게 되었고, 봉황산에서 하나의 지류가 흘러 현재 부석사가 위치한 지점에 국(局)을 형성한 것이 표현되어 있다.

즉 부석사의 주산으로는 봉황산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2016년 기자가 부석면 북지2리 부석사 방골마을 탐방할 때 봉황산 정상에 올라 봤다. 부석사 자인당 뒤편으로 길을 잡아 올라갔는데 정상에는 표지석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그저 순한 흙에 순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뿐,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100년 전 방치된 원융국사비(1914)
100년 전 방치된 원융국사비(1914)

 

부석사 현 위치 입지 경유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왕의 명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했다.

부석사가 현재의 위치에 입지하게 된 경유에 대해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 전한다. 의상이 신라에 입국한 이래 사찰 창건을 위해 여러 곳을 유람하게 되었고, 이중 백제‧고구려의 바람과 마소가 미치지 못하는 땅을 선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의상이 사찰을 정하고 난 후 “땅이 신령하고 산이 빼어나 진실로 법륜을 펼 수 있는 땅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봉황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석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라 이래 천년고찰이다. 의상대사에 의해 해동 화엄의 종찰로서 사찰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수많은 화엄종의 승려뿐만 아니라 신라말 고려조의 선종 조사 대부분이 이곳 부석사에서 수학했고, 고려조에도 원융, 원응 국사와 같은 국사를 배출했으며, 조선시대 역시 불교의 중심으로 일익을 담당했던 사찰이다.

1916년 해체수리 중 발견된 무량수전 개연기
1916년 해체수리 중 발견된 무량수전 개연기

부석사 무량수전 창건 기록

부석사 창건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건립에 관한 자료는 현재 몇몇의 문헌(文獻), 비문(碑文), 개연기(改椽記), 중수기(重修記) 등 소수의 자료만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7권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문무왕 16년(676) 봄 2월에 고승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十六年春二月高僧義相奉旨創浮石寺).’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 4권 의상전교조에는 ‘의봉 원년(676) 의상이 태백산으로 돌아와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儀鳳元年湘歸太白山奉朝旨創浮石寺).’는 기록이 있다. 두 문헌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 부석사 창건 시기를 676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융국사비에 새겨진 부석사

현재 부석사에는 고려 광종 15년(964)에 태어나서 고려 문종7년(1053)에 부석사에서 입적한 원융국사(圓融國師)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 원융국사 비문에는 원융국사의 일대기를 담고 있으면서 부석사와 관련된 몇 가지 자료를 담고 있다.

원융국사 비문에는 ‘상전(像殿)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寶處)도 없으며 또한 전전(殿前)에 영탑(影塔)도 없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지 않으신 까닭에 궐시(闕時)가 없으므로 좌우보처상을 모시지 않았으며, 영탑을 세우지 아니한 것은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깊은 종지(宗旨)를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문도들에 이르기를 …나도 반드시 앞으로 더 이상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을 터이니, 이미 이전에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를 정중한 봉안의식을 거쳐 안국사(安國寺)에 진장(鎭藏)토록하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 내용을 통해 아미타불을 모신 건축물이 1053년도 이전부터 건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건축물 내부에는 오직 아미타불만 봉안되어 있고, 정면에는 탑이 건립되어 있지 않다는 내용을 통해 당시 가람배치와 불상 봉안에 관한 논의가 있으며 이를 원융국사는 화엄일승사상으로 설명했다. 이 밖에도 원융국사가 입적한 1053년 전에 부석사에서 대장경을 조성했고, 1053년에 대장경 일부를 안국사로 옮겼다는 대목도 있다.

무량수전 중건에 관한 기록

1916년 일제강점기 때 부석사 무량수전 완전 해체 수리 당시 다양한 묵서명이 확인됐으며, 이 중 무량수전 배면 서북측 모서리 공포에서 확인된 봉황산 부석사 개연기(鳳凰山 浮石寺 改椽記) 묵서명(墨書銘)은 무량수전 중건에 관한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봉황산 부석사 개연기에는 ‘부석사는 의봉(儀鳳) 원년(676) 의상에 의하여 창건된 이후 무량수전이 원순제(元順帝) 17년인 1358년에 적병의 방화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홍무(洪武) 9년(1376) 원융국사에 의하여 법당이 개조되고 불상을 개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개연기에 적힌 원융국사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964년〜1053년의 인물이며 무량수전 재건 연도인 1376년과는 맞지 않다. 다만 무량수전이 중창되던 1376년 당시 부석사에는 이름이 비슷한 원응국사(圓應國師, 1307〜1382)가 주석(住錫)하였으며, 기록의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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