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의 건립 목적과 숨겨진 비밀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삼국통일 기념불상이다(680년대 조성)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삼국통일 기념불상이다(680년대 조성)

가흥동 삼존상 조성 목적은 나당전쟁 승리와 삼국통일 위업 기념불
죽령을 넘을 사람과 죽령을 넘어 온 사람들은 삼존상 앞을 지나야
당시 왕경(王京)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이 조성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오랜 세월 지역주민들의 삶과 함께 해왔다. 기자가 국민학교 다닐 무렵(1950년대 말) 삼존상이 있는 곳을 ‘부처모랭이’라고 했다. 놀이터가 없던 때라 아이들은 이곳에서 숨바꼭질하거나 타잔 놀이를 했고, 가끔 머리를 단정히 빗은 할머니가 합장하고 기도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 삼존상 앞 광장에는 삼존상 국보 승격을 염원하는 연등탑과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다. 지난달(3.25)에는 영주시가 주최하고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후원하는 국보승격기원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때 단국대 정성권(사학과 초빙교수, 문학박사) 교수는 “삼존상은 7세기 후반 조성된 마애불”이라며 “조성 목적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위업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보물로 지정(1963.1.21 제221호)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영주 시가지 남서쪽에 위치한 높이 12m의 암반 위에 조각되어 있다. 이 삼존상은 층단을 이루어 형성된 암반 상단에 조성되었는데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암반의 남쪽 하단면에는 선사시대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삼존상이 조각되어 있는 서천 가의 암반은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계속해서 신성시 되고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이 삼존상은 마애불임에도 불구하고 환조(丸彫)에 가깝게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조각 솜씨 또한 매우 우수하다. 7세기대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왕경(王京)이었던 경주의 7세기 석조불상과 비교하여도 조각의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주는 석조불상이다.

삼존상의 양식적 특징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중앙에 좌상의 여래상이 있으며 양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다. 삼존상의 높이는 2.2m이며 대좌 아래부터 광배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약 3.3m이다. 이에 반해 입상 형태인 좌우협시불의 대좌부터 광배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약 2.1m이다. 협시보살상을 포함한 삼존상의 전체의 가로 폭은 3.3m이다.

광배와 대좌를 포함한 본존불의 높이가 3.3m에 이르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로 폭과 최대 높이는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여래상의 크기에 비해 협시보살상의 키가 작기 때문에 전체적인 정면 구도는 오각형 모양이다.

또 여래상의 입체감이 뛰어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여래상의 광배는 등에 붙이고 있는 환조상(丸彫像)이라 하여도 될 만큼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여래상의 광배는 복판의 연판문을 돌출되게 표현한 연화문 도광이 여래상 머리 뒤에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확인되는 특징은 7세기 석불의 양식적 특징 중 하나로 언급할 수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부석사 창건과 소조여래좌상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의 조성시기와 조성 배경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석사의 창건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석사는 676년 2월 의상이 왕명을 받고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에 대해 특별히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676년 2월 전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는 당나라와 국운을 건 격렬한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부석사가 창건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기사에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신라의 여러 성이 함락되고 지휘관과 백성이 죽어가는 내용이 많다. 이러한 위급 상황 속에서 의상이 왕명을 받고 부석사를 창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숨겨진 비밀로 내려오다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675년 9월 당시 사료<삼국사기>

「675년(문무왕15) 9월 안북하(예성강)를 따라 관성(關城)을 설치하고, 또 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단양 영춘)에 들어와서 위협 약탈하므로, 성주 소나가 이를 맞이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경기 파주)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는데 소수(少守) 유동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적목성(강원 회양)을 포위하여 이를 멸망시켰는데, 현령 탈기는 백성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으나 힘이 다하여 모두 전사했다. 또 석현성(임진강-한강)을 포위하여 이를 함락시켰으므로 현령 선백, 실모 등은 힘껏 싸우다 모두 죽었다. 또 우리 군사는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에 모두 이겨, 머리 6천47급을 베고 말 200필을 얻었다」

부석사 창건-소백산 방어선

부석사 창건 기사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부석사는 단순히 의상이 화엄 교리를 실행하는 화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창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의상은 나당전쟁 이후 해동화엄의 초조가 되고 부석사가 대승 교법을 널리 펴는 화엄의 중심도량이 되었지만 창건 당시의 부석사 건립 목적은 종교적 측면보다 나당전쟁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될 것이다. 부석사 창건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창건 시기와 부석사의 위치이다. 창건 시기는 나당전쟁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으며, 부석사의 위치는 관방 유적과 연계된 교통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석사의 창건은 소백산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방어선과 관련 지울 수 있다. 부석사 서쪽에는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교통로인 마구령이 있으며, 동쪽에는 늦은목이가 있다. 이 고갯길을 이용하여 소백산을 넘으면 바로 온달산성이 나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석사는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대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후방의 배후 기지 역할 또한 창건 목적에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존불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감은사지 삼층석탑(682년 완공)
삼존불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감은사지 삼층석탑(682년 완공)

​​​​​​​나당전쟁 승리를 위해

의상은 부석사에 아미타불을 조성하면서 수인을 항마촉지인으로 결정했다. 주불의 수인(手印)을 항마촉지인으로 결정한 이유는 수인의 명칭인 ‘降魔觸地印’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항마촉지인은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고 승리를 증명하는 수인으로 부석사의 창건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의상에게 있어 나당전쟁기의 당나라 군대는 신라를 침략하는 마귀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위태한 상황에서 의상은 불력에 기대어 마귀(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부석사 주불로 봉안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존상의 건립과 의미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은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불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건립 위치는 예천과 봉화, 단양과 안동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십자형으로 교차하는 교통의 핵심 분기점이다. 특히 불상 앞의 길은 풍기를 거쳐 죽령으로 직접 연결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에 자리 잡은 불상임을 알 수 있다.

676년 11월 당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신라에게 패한 후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마침내 대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것이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새롭게 점령한 영토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체계적인 국가 기간망 정비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요 교통로에 사찰과 불상을 창건한 것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가흥동 삼존상은 ‘길 위에 부처’로서 불상 앞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불상이다. 죽령은 넘어 온 사람이나 죽령을 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삼존상 앞을 지나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가흥동 삼존상은 불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중요한 속성 중에서 기념비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 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상, 나당전쟁 승리 기념불

나당전쟁이 치열하던 676년 2월 의상이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할 때 아미타불로 조성하였음에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이유는 당나라 군대를 불력에 기대여 제압해야 할 항마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가흥동 삼존상의 조성 배경은 이 불상이 보여주는 강한 기념비성을 주목하고 있으며, 당시 가장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중앙정부의 장인이 조성해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삼존상의 조성 목적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위업과 나당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속성을 나타내는 또 다른 석조미술로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완성된 682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어 조성 시기는 68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흥동 삼존상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통일 기념 불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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