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조에 대한 권정의 지조를 담은 반구정과 봉송대
정도전과 동시대를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고려 충신 권정

권정은 김해부사 재임 중 고려가 망하자 안동 임하 옥산에 은거
​​​​​​​반구정은 고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봉송대는 송도를 받든다는 뜻

구산 남서편 동구대 위에 세워진 봉송대(1950년대 모습)
구산 남서편 동구대 위에 세워진 봉송대(1950년대 모습)

숨겨진 보물을 찾아다니는 기자를 보고 한 지인이 “구성공원에 가면 도다지를 캘 것”이라고 했다. 말씀 따라 구산에 올라보니 한 걸음 한 발자국마다 역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실로 행운을 챙기게 됐다.

지난 호까지는 구산의 역사와 삼판서고택의 주인인 정운경‧황유정‧김담 등 삼판서와 정도전에 대해 알아봤다. 이어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동시대를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고려 충신 권정(權定, 1353~1411)의 충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봉송대(奉松臺) 현재의 모습
봉송대(奉松臺) 현재의 모습

구산 아래 터 잡은 안동권씨

조선 시대 때 영주의 중심은 철탄산 아래(현 영주초)였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 영주의 중심은 구산(龜山) 아래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구산 주변 지역은 조선 때 영천군 봉향리 성저방(城底坊)이라 불렀다.

구산은 형상이 거북이 모양처럼 생겨 거북 구(龜)자 구산이다. 거북 등에 해당하는 가학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권정의 후손들이 남긴 유적이 많이 보인다.

구산 가운데 부분 서편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앞에 반구정(伴舊亭)과 구호서원(鷗湖書院) 구지(舊地)가 있다. 또 임진왜란 전에 창고와 샘이 있던 자리엔 대은정(大隱亭), 삼맹와(三盲窩) 춘수당(春睡堂), 모명재(慕明齋) 등 유적이 지금도 건재하다. 구산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는 동구대 위 봉송대(奉松臺)는 구산 남서쪽에 있다. 이 모두 권정의 후손들이 남긴 유산들이다.

안동권씨가 안동 옥산동 도목촌에 살다가 영주에 와 살게 된 것은 권정의 둘째 아들 권요(權曜, 1379〜1460)가 영주에 사는 생원 민의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비롯됐다. 이후 권요의 후손들은 구산 아래를 중심 세거지로 영주동 뒤새‧사례, 평은면 미림, 이산면 원리‧지동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반구정(返舊亭)과 구호서원 구지
반구정(返舊亭)과 구호서원 구지

권정은 누구인가?

권정(權定)은 시조 행(幸)의 14세손이고 검교대장군 척(倜)의 현손이며, 고려부사 현(權顯)의 아들이다. 1353년 안동부 예안현 북계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안지(安之)이고 호는 사복재(思復齋)이다. 그는 1386년(우왕12) 야은 길재(吉再),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괴산지군사(槐山知郡事)를 지내다가 좌사간(左司諫)에 임명됐다. 당시의 고려말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 잡고자 권신들의 비리를 추적하다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좌천됐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으며, 당시 직간과 절의로 명성을 얻었다. 사복재는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가 벼슬로 불렀으나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 북쪽의 옥산동(玉山洞) 도목촌(桃木村)에 내려와 은거했다.

그는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했는데, 이는 “고려 왕조가 다시 회복될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고, 집 앞에는 정자를 지어 반구정(伴舊亭)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로 돌아간다는 뜻의 ‘반구(返舊)’라는 음을 딴것이고, 대를 지어 봉송대(奉松臺)라고 했는데, 이 또한 송도(松都, 개성)를 받든다는 ‘봉송(奉松)’의 음을 붙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 즉, 고려에 대한 절행은 이후 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태조는 사복재에게 승지(承旨)를, 태종은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고려를 마음에 품고 있어 새 왕조인 조선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복재는 안동의 옥산동 도목촌에서 1411년(태종11)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사람들은 그가 은거하던 마을을 ‘벼슬을 버린 마을이라 하여 버릴 기(棄)자와 벼슬 사(仕)자를 따와 기사리(棄仕里)’라 불렀다.

사복재 권선생 신도비(神道碑)
사복재 권선생 신도비(神道碑)

권정의 지조 담은 ‘봉송대’

시내 중앙로 영주우체국 서편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카데미모텔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오뚝 솟은 대 위로 보이는 정자가 봉송대(奉松臺)다. 봉송대는 원래 안동부 임하면 옥산동 도목촌에 있었는데 1780년(정조4)에 권정의 둘째 아들 권요가 영주로 옮겨 살게 된 후 권요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건하게 됐다.

봉송대 편액은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이 행서체로 썼다. 봉송대에는 종후생(宗後生)인 권상익(權相翊)과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의 ‘봉송대기(奉松臺記)’가 있다. 그리고 선성 김사진(金思鎭)의 ‘봉송대이건지략(奉松臺移建識略)’과 후손 권태춘(權泰春)의 ‘봉송대이건상량문(奉松臺移建上樑文)’이 걸려 있다. 봉송대의 동편에는 사복재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처음에는 봉송(奉松)을 ‘봉송(鳳松)’이라 했다.

‘봉송(奉松)’이라고 쓰면 바로 고려의 옛 도읍지인 송도(松都)를 받든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봉(鳳)’자를 써서 ‘봉송(鳳松)’으로 대의 이름을 붙이게 됐다. 조선 시대에 고려를 받든다는 의미의 ‘봉송(奉松)’을 쓴다는 것은 후손들에게는 큰 위협을 안겨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봉송대(奉松臺)라는 명칭은 ‘고려의 수도 송도(松都)를 받든다(奉)’는 의미로, 고려 왕조에 대한 권정의 지조(志操)를 담고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바위글씨
불사이군((不事二君) 바위글씨

반구정(伴鷗亭)

봉송대 옆을 지나 약 50m쯤 가면 불사이군(不事二君) 바위 글씨가 있고, 다시 50여 m쯤 가면 구산 둔덕에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옛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반구정』이다.

반구정은 고려말 충절을 지킨 좌사간(左司諫) 권정(權定)이 옛 고려(高麗)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정자의 이름을 반구정(返舊亭)이라 명명(命名)하였으나 후손들이 왕의 미움을 살 것을 우려해 반구정(伴鷗亭)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조선 정조 4년(1780년) 권정의 후손들이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던 정자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구호서당(鷗湖書堂)

구산 서쪽 기슭에 구호서당이 있었다. 생원 권용섭(權龍燮)이 영조 7년(1731)에 창건하고, 정조 8년(1784) 진사 권명수(權命守)가 중수했다.

좌랑(佐郞)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은 중수기(重修記)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인암공(忍庵公)이 묘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출세를 외면하고 성리학에 전심 노력했다. 구성 북쪽 언덕에 토실(土室)을 얽어 몇몇 후진들과 독서하더니, 불행하게도 그 서실이 없어진지 50여 년에, 그 족숙되는 진사 명수(明守)가 헌종 9년(1843)에 일가 약룡(若龍)씨와 함께 그 옛터에 새로 대청 4칸, 정실(淨室) 2칸을 이룩하여 훌륭한 학사를 이루었다.

북에서 오는 두 물이 괴천(槐川:귀내)에서 합류되어 동구대‧서구대 사이를 빠져 남산평야를 누벼 달리고, 멀찌기에 학가산‧주마산‧용암산‧도솔산 등 여러 산봉오리가 늘어서 산수의 아름다움이 영남의 첫째라 함이 과장이 아니리라. 또 동쪽에는 박 소고의 옛 터전, 남쪽에는 김 문절공‧김 유연당의 고택, 서쪽에는 김 백암의 구학정 등이 있으니, 다 옛 명현의 유적으로, 아직도 그 여운이 있어 여기 오르는 이 뉘라서 우러러 사모하고 흥기하는 마음이 없을 것인가.

이로부터 권씨의 자손된 이, 이 당우(堂宇)의 공고함을 보고, 부형(父兄)의 근로를 생각하여 배우고 가르침에 반드시 인암공의 방식으로 부지런히 힘써 정진하면, 上으로는 진덕수업(進德修業)의 군자가 될 것이요, 버금으로는 조정에 뽑힐 것이며, 下라도 향당의 어진 선비는 될 것이니, 이리하면 사간공(司諫公:思復齋)‧남천공(南川公:斗文)‧아맹공(啞盲公:昌辰) 등 훌륭하신 선조님들의 유업을 계승함이요, 고장 여러분 선현의 유풍(遺風)을 저버리지 않음이리라.……」라고 썼다.

최근 반구정 중수 과정에서 구산서당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조보양의 중수기와 내용이 흡사하다.

구호서원(鷗湖書院)

정조 4년(1780) 영주 구산 서쪽 기슭에 반구정(伴鷗亭)을 세우고, 별묘(別廟)를 정자 동쪽에 지어 좌사간(左司諫) 권정을 제사하려 할새, 봉안하는 날 사림에서 모여 ‘선생은 풍절(風節)이 사(社)에 제사할 만하다’하고, 드디어 구호사(鷗湖社)라 이름하였다.

순조(純祖) 12년(1812) 예안 도회 통문이 향교에 왔으니, 대개 남천 권두문‧유연당 김대현‧학호 김봉조‧아맹 권기창 네분을 함께 봉안한다는 뜻이었다. 향중이며 도내 각 서원에 알려 이듬해 네 분을 봉안하고 구호서원으로 승격 묘호를 경현사(景賢祠)라 하고 강당은 명교당(明敎堂)이라 하였다.

그 후 구호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없어졌다. 지금은 반구정 앞에 구호서원 구지(舊地) 표석만 남아있다. 반구정과 봉송대를 취재하는 동안 유적을 안내해 주시고 문중약사를 제공해 주신 권오섭‧권오철‧권중수 안동권씨 검교공 영주파 종중께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