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판서는 조선의 하늘을 연 ‘김담’

김담의 묘(자헌대부 이조판서 김공지묘)
김담의 묘(자헌대부 이조판서 김공지묘)

김담은 1416년 영천군 성동리 구산 아래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
세종17년(1435) 형과 정시 문과 동진사 4인(淡)과 5인(潧)으로 급제
집현전 직제학, 칠정산 저술, 안동도호부사, 경주부윤, 이조판서 제수

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는 고려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인데 정도전의 아버지다. 두 번째 판서는 고려말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 전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이다. 그는 첫 번째 판서인 정운경의 사위이면서 정도전의 여동생 남편이기도 하다.

황유정은 사위 선성김씨 김소량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고, 김소량의 아들이 이조판서를 지낸 천문학자 김담이다. 그러니까 정도전 여동생의 외손자가 김담이다. 즉 김담의 외할머니(봉화정씨)의 오빠가 정도전이다.

무섬마을에 있는 무송헌 종택
무섬마을에 있는 무송헌 종택

예안 김씨 영주 입향

예안 김씨의 영주 입향은 시조 김상(金尙)의 8세 김로(金輅)의 아들 사형제 중 맏아들 김소량(金小良)이 평해황씨 황유정(黃有定, 1343-?)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옮겨 살면서부터 시작됐다. 김소량의 생몰 연대(1384-1449)로 역산해 보면 1400년에서 1410년 사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담이 영주에서 태어난 해가 1416년이니 그 전에 이거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김소량이 장가들어 처음부터 처가살이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무렵 순흥에는 안향의 순흥 안씨, 풍기에는 풍기 진씨, 영주에는 평해 황씨, 봉화 정씨, 단양 우씨, 감천 문씨, 영주 민씨 등이 세거했고, 이들이 고려 조정을 득세했다. 조선 때 안동이 인재의 보고였다면 고려 때는 영주가 보고였다. 따라서 김소량의 영주 입향은 선진지적인 터전으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다.

'빈동재사'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 지정
'빈동재사'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 지정

김담의 어린 시절

김담은 1416년(태종16) 영천(榮川) 성동리(城東里)에서 판서공 소량(小良)과 정부인 평해황씨 사이에 3남(潧, 談, 洪) 1녀(聾巖 李賢輔의 외조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김담의 어릴 적 생활은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문집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총명(聰明)이 남달라 7세부터 수학하였는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한 번 보면 문득 기억하였다.」고 전한다. 김담의 외조부인 판서 황유정이 물려준 사위의 집(삼판서고택)을 찾아가 ‘외손자 김담을 만나 총명함을 칭찬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는 대목에서 외조부(황유정)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담의 어머니는 평해황씨로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의 딸이다. 또한 황 판서는 근재 안축의 외손자이며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인 삼봉 정도전을 처남으로 두었다. 이러한 명문가에서 자란 김담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아 전형적인 현모양처로 기품있고 자질이 뛰어났다. 이러한 모친의 훈육은 자녀에게 이어져 증(潧), 담(), 홍(洪) 3형제를 당대의 명사로 키워놓았다.

청운의 꿈을 펼치다

김담은 구산 아래 삼판서고택에서 형 증(潧)과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8세(1434년)에 서울로 올라가 1435년(세종17) 약관의 나이로 형과 함께 정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 제4인()과 제5인(潧)으로 나란히 급제하여 그날로 형제가 집현전에 출사하여 종사랑(從仕郎) 집현전 정자 겸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임명됐다. 이조 정랑으로 재직하던 1447년(세종29) 김담의 나이 32세에 문과중시(문과 급제자를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에 을과 1등 3인 중 첫째가 성삼문, 둘째가 김담, 셋째가 이개였다.

집현전에 나아가다

김담이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集賢殿)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435년(세종17) 19세 때 일이다. 김담은 19세에 집현전 정자(正字)로 들어가 21세인 1437년(세종19) 저작랑(著作郎), 24세 박사(博士), 26세에 부수찬(副修撰), 35세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김담은 집현전에서 17년간 활동했으며, 1품계 평균 재직 기간이 1년 7개월이었다. 특히 집현전 학사 75명 중 집현전 초입 연령이 네 번째로 어린 19세였다.

김담 선생 신도비(빈동산, 봉화 문단)
김담 선생 신도비(빈동산, 봉화 문단)

관료(官僚) 생활

김담의 관료 생활은 크게 내직과 외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출사에서 20여 년은 집현전과 서운관(書雲館), 사헌부, 봉사시, 사재감, 호조, 이조, 전농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외직에 나아가서는 충주목사, 안동도호부사, 상주목사, 경주부윤 등 주로 향리의 인근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조판서에 오르다

경주에서 6년의 임기가 끝날 무렵 나포(拿捕)의 명이 내리고 1463년(세조9) 7월 중추원부사에 임명되더니 8월 29일에 이조판서에 제수(除授) 되었는데 『실록』에 보면 세조가 ‘이조판서 제수의 배경을 설명했다’고 적었다.

김담은 지병이 있어 두세 번 사직을 올렸으나 세조가 끝내 윤허하지 않고 중사(中士:내관)를 명하여 문병토록 하였는데 빠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세조가 경주 부윤을 세 번이나 유임시킨 뒤 “죄도 없이 붙잡혀 왔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김담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세조의 마음이 잘 나타난 대목이다.

호(號)를 ‘무송헌’이라 하다

김담의 호 무송헌에는 단종에 대한 절의(節義)가 깊이 숨어져 있다. 무송(撫松)은 저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시〈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연유한다.

단종 폐위 후 세조 정권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김담의 호 ‘무송헌(撫松軒)’에는 단종에 대한 간절한 절의와 자연 으로 돌아가고 싶은 고결한 선비의 심성이 녹아 있다. 김담의 호 ‘무송헌’은 바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해는 어둑어둑 지려 하는 데도 못내 아쉬워,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머뭇거리네(影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에서 얻었다.

조선의 하늘을 연 김담

조선 초 우리나라는 매년 명나라 연경에 가서 역서를 가져와 사용했다. 그러나 세종 시대 김담에 의해 우리 기준에 맞는 역서 개발을 추진한 것이 바로 칠정산(七政算)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양의 일출‧일몰 시간을 기준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역법을 개발한 것이다.

김담은 우리의 과학 기술로 직접 역법으로 교정해 칠정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조선이 전 세계에서 지방시(地方時)를 시행한 몇몇 국가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세계 천문학사적으로나 과학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있었다. 김담이 찬정(贊政)한 위대한 칠정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적 자존심과 민족적 긍지를 일깨우게 한다. 김담은 조선의 역법 체계를 바로 세워 역법 독립과 천문학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우주의 신비를 예고한 바 있다.

김담의 유적을 찾아서

김담은 1416년 11월 29일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났다. 1434년 외조부인 황유정 판서가 외손자집에 와서 지어준 시가 삼판서고택 안채 대청 벽에 걸려 있다. 고택 뒷산이 구산(龜山)이다. 김담이 어릴 적 형제들과 구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길렀을 것으로 보여진다.

문수면 적동2리 꾀꼬리마을(조선 때 黃鳥洞)에 가면 김담의 아버지 김소량의 묘전비를 비롯하여 선대 묘소와 재사가 있다. 황조동은 김담의 할아버지 김로(金輅)가 영주로 이거하여 처음 정착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수면 수도리에는 무송헌 종택이 있다. □자형 전통 한옥 사랑채에는 무송헌(撫松軒) 현판이 걸려 있고 김담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찬시 친필 시판도 걸려 있다. 종택에는 김담의 19대손 김광호 종손이 살고 있다.

김담은 1464년 7월 9일 서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음해(1465) 9월 영천(영주) 북쪽 빈동산(賓洞山)에 장사 지냈다. 묘소가 있는 빈동산은 현 봉화 문단리에 있다.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다. 마을 회관에서 묻고, 논 가는 어르신께 묻고, 트랙터로 일하는 농부에게 묻는 등 물어물어 찾아간 끝에 ‘빈동재사’를 찾았다. 묘소 가까이 갔을 때쯤 길새에서 선생의 신도비도 만났다.

재사 동쪽 30m 거리 산등성이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 시 문절 김공지묘(資憲大夫 吏曹判書 諡 文節 金公之墓)’를 찾아 참배했다. 재사는 1753년(영조29) 후손들이 건립했다. ‘창틀’ 구조와 ‘고콜’(관솔불을 끼워 켜 놓을 수 있도록 바람벽에 구멍을 뚫어 놓은 자리), 부뚜막 ‘등잔’ 등 당시 재사 건축 특징이 잘 보존되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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