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과 사찰의 건축에 깃든 매화
회화와 공예에 빛나는 매화
​​​​​​​문학작품에 나타난 매화

매화문양 복주머니
매화문양 복주머니

예부터 매화는 인류의 생활 가운데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문화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특별히 건축과 공예 회화와 문학, 그리고 식품과 약용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건축분야의 매화

창덕궁 인정전과 대조전의 기와지붕 용마루에는 각각 5개씩의 커다란 매화꽃이 놋쇠로 만들어져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매화꽃 문양은 인정문의 용마루에는 3개가 있다. 한편 희정당의 선평문 문루의 단청무늬 가운데는 금채색의 매화꽃 문양이 있고, 대조전과 여춘문 등의 지붕 섣가레에도 매화꽃 문양이 흰 꽃으로 그려져 있다.

인정전 용마루 매화
인정전 용마루 매화

자경전 외곽의 담장에 시문된 꽃담 매화는 회화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아미산 굴뚝의 매화 문양이라든가 청향각 굴뚝과 창경궁 영춘헌 돌계단 위의 돌기둥에 새겨진 매화문양도 대단히 훌륭하다.

낙선재의 장락문을 지나 한정당을 들어서는 출입문의 지붕 기와에는 여러 종류의 무늬와 함께 매화 무늬가 선명하다.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의 창살문에 조각된 매화 문양과 동래 범어사 독성전 문 창살 솟을 매화 문양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작품성을 나타내고 있다.

산청 대원사 대웅전 네 짝의 창문에는 매,란,국,죽이 새겨져 있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인 흥국사興國寺 적묵당寂黙堂 처마 밑 단청 가운데 하나인 매화 그림은 채색은 퇴색했지만 백매의 꽃 빛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조전의 단청매는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어있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스님의 발걸음이 한결 경쾌해 보인다.

해남 대흥사의 매화꽃담 무늬와 장성 백양사의 꽃담도 운치가 있다.

독성전 매화문양
독성전 매화문양

회화분야의 매화

우리나라의 매화그림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태조 왕건(847-918)릉의 벽에 그려진 ‘세한삼우도'와 고려말 승려 해애海涯가 그렸다는 일본 묘만사에 가 있는 매화도가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정지상鄭知常(?∼1135)과 김부식金富軾(1075∼1151)등도 묵매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묵매도의 역사는 중국의 경우 북송말엽(11세기)이고 우리나라는 고려말엽(13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의 시기별 묵매도의 발전과정을 보면, 조선 초기의 묵매화로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매화첩》과 《조선백자》 등의 도자기에 그려진 매화도가 있으며, 중기에 들어와서는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묵매도 화풍이 새롭게 정립되었고, 어몽룡을 비롯한 조지운趙之耘(1637∼?), 오달재吳達濟(1609∼1637) 등 걸출한 작가들이 나타났다.

매화도
매화도

어몽룡魚夢龍(1566∼?) 의 〈월매도〉는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쭈-욱 뻗어 올라간 곧은 가지에 드문드문 꽃망울이 맺혀있는 모습을 하여 매화의 품격과 멋을 잘 드러낸 명작으로 남겼다. 후기에는 강세황姜世晃(1712∼1791)이 대표적인 묵매화가로써 지금까지의 묵매도 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화풍으로써 깔끔하고 정겨운 가지에 몰골스런 꽃을 그렸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문인화풍이 점차 전래되면서부터 매화의 고졸한 면을 탈피하여 굵다란 줄기에 수없이 많은 가지를 배치하여 번다하고 풍요로운 꽃과 꽃봉오리를 그리는 소위 조희룡趙熙龍(1789∼1866)화풍이 일기도 했다.

조선백자 매화그림
조선백자 매화그림

무엇보다도 조선시기 천재 화가로 이름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를 비롯하여 혜원慧園 신윤복(申潤福, 1758~?),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 등 소위 삼원三園으로 불리는 중인계급의 전문적인 전업傳業화가들에 비하여 사재四齋로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永錫(1686-1761) 등은 모두가 명문 양반 계급의 사대부 출신 선비, 문인화가 들로서 이들 모두가 출신성분을 떠나 합심, 협력으로 당시까지 답습해 오던 중국식의 화풍을 과감히 청산하고, 우리 고유의 전통회화에 대한 변별력辨別力을 제시하여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던 화가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중국의 화풍을 완전히 벗어나 가장 한국적인 미의식이 내포된 묵매도의 독특한 품격을 갖추기에 이르렀으며, 줄기의 생김새는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백이 있고 가지와 가지 사이가 텅 비어 있으면서도 채워진 듯하고 거기에는 달콤한 시상이 넘쳐나며 꽃과 봉오리는 있는 듯 없는 듯 드물게 피어있는 가난한 선비의 모습, 그것을 한국적인 묵매도의 전형으로 여긴다.

은장도
은장도

우리는 묵매화의 특징이 화풍이나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무기교無技巧의 기교技巧”라는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美(소가주마疎可走馬 : 성긴 곳은 말도 달릴 수 있다)와 자연주의 경향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단순한 것이 채워진 것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를 깨달으며, ”여백餘白과 공간空間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이러한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本質과 실상實相을 받쳐주는 것이다“(법정法頂)라는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동해의 거친 파도를 시 한 수로 잠잠하게 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도 한 폭의 묵매도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아름다운 매화 그림에 대한 감동이 어떠 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공예품과 문방사우의 매화

공예 부문의 매화로는 은장도와 연인들의 비녀, 가락지, 노리개를 비롯하여 베개닛과 복주머니와 다식판 등 실로 다양한 것들이 있으며, 문방사우로는 매화분 벼루 연적, 문진, 관복함과 시전지판 등이 있다.

귀중품 보관함
귀중품 보관함

문학작품에 등장한 매화

문학작품에 등장한 매화로는 『한국문집총간』 전 100권에 수록된 매화시가 총 844수이며, 개인적으로 매화시를 가장 많이 남긴 선비로는 퇴계 이황이 85제 118수이고, 정약용의 아들 학유가 36수를 썼으며, 자하 신위도 30여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위에 열거된 매화관련 유물들은 필자가 그동안 애써 수집한 290여 점을 〈영주선비매화공원〉문화관에 전시하도록 영주시에 무상 기증하여 소수서원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므로 매화문화관 건립이 완성될 경우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매화시 서예작품
매화시 서예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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