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2,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

2008년 이전 복원한 삼판서고택 현재 모습
2008년 이전 복원한 삼판서고택 현재 모습

세상 공리에 담박하면서 가산에 신경 쓰지 않는 청백리의 표상
불의에 맞서고 백성들 편하게 하는 지방관으로 모범 보여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을 벗하는 뜻에 순응해

지난 호에 이어 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인 정운경을 소개한다. 정도전이 직접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은 방대하면서도 정중하다 할까. 그래서 2회에 걸쳐 소개하게 됐다.

어린 정운경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영주(榮州)와 복주(福州:안동) 향교에 다닐 때 매번 수석을 차지해 보는 사람마다 우러러 귀중하게 생각했다. 개경에 올라와 십이도(十二徒, 고려사학)와 교유하며 이곡(李穀) 등과 사귀었다.

1326년(충숙왕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330년 문과(동진사)에 급제해 이듬해 상주목 사록으로 나갔다. 이후 정운경은 젊은 나이에 지방 관직으로 나아가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는 한편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공정과 정의가 아니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 되었다.

숭록대부 형부상서 염의 선생 정공지묘
숭록대부 형부상서 염의(廉義) 선생 정공지묘

하정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지순(至順) 5년(乙酉, 1345년, 충목왕1) □월 조정(朝廷)으로 들어가서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고, 동 6년(丙戌, 1346, 충목왕2) 10월 봉선대부(奉善大夫)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었으며, 이해 겨울 하정사(賀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황후 기씨(奇氏)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내시들 중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는데, 술과 안주를 대접하면서 매우 거만하였다. 선생께서 정색한 다음 “오늘 나에게 대접하는 것은 옛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내시들이 놀라서 “우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公)은 큰 수재(秀才)이십니다.”라며 조아렸다.

가는 곳마다 기강 엄숙

동 7년(1347) 3월에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고 그해 12월에 봉상전교부령직보문각지제교(奉常典校副令直寶文閣知製敎)에 올랐다가, 동 8년(1348) 2월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로 나가고, 이듬해 9년(1349) 10월에는 교주도(交州道) 안렴사로 나갔다. 선생이 가는 곳마다 고을에 기강이 엄숙하게 섰다.

동 10년(1350) 4월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듬해 11년 정월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는데, 옥사(獄事)가 잘 다스려져서 원통(冤痛)하고 지체(遲滯)됨이 없었다.

동 12년(1352) 9월에 또 전주목사(全州牧使)로 나갔는데 봉순대부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의 차함(借啣)으로 갔다. 이때 전주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가뭄이 심했는데 선생이 부임하는 날 큰비가 와서 관리와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정운경을 모신 묘현사에서 매년춘향제가 열린다
정운경을 모신 묘현사에서 매년춘향제가 열린다

어향사 횡포에 맞서다

그때 어향사(御香使) 노모(盧某)는 횡포(橫暴)가 아주 심해 가는 곳마다 수령들을 능욕했다. 그 고을로 달려 들어와서는 선생에게 들 밖까지 영접 나오지 않았다고 죄목을 잡았다. 선생이 예(禮)에 입각해 굴하지 않고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부로(父老)들이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이렇게 되자 어향사도 부끄러워 사과하며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가버렸다.

그 뒤 여러 번 조정에서도 명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신년(1356, 공민왕5) 7월 중산대부(中散大夫)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제수하고 무반(武班)의 전선(銓選)을 맡겼는데, 그 전형과 주의(注擬)가 아주 공명(公明)했다.

이해 9월에는 서해도(西海道) 찰방(察訪)으로 군수품을 겸해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 이때는 전쟁 초기이기 때문에 군량 확보가 가장 긴급했다. 선생이 한 달 만에 곡식 수십만 석을 운반해 일을 마치니, 국가에서 여러 도에 독촉(督促)할 때는 서해도의 사례를 비유(比喩)했다.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고자 1926년 건립한 문천서당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고자 1926년 건립한 문천서당

백성을 편하게 하는 지방관

지정 17년(1357, 공민왕6) 2월에 중대부(中大夫) 비서감보문각직학사(秘書監寶文閣直學士)가 더해지고, 4월에는 존무강릉겸삭방도채방사(存撫江陵兼朔方道採訪使)가 되었다.

삭방도 여러 고을이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함몰(陷沒)되어 국경(國境)이 분명히 나누어 있지 않아서 전투가 벌어지면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선생은 강역(江域)을 정하고 백성의 살림을 보살피되 그 지방 실정에 알맞게 하니, 백성들은 편안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부로(父老)들 수백 인이 조정(朝廷)에 천장(薦狀)을 올렸고, 지금도 그 일이 칭송(稱頌)되고 있다.

영록대부 형부상서가 되다

그해 7월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제수되고, 이듬해 18년(1358) 2월 본직(本職)으로서 형부사(刑部事)를 맡게 되었다. 그러자 도평의사(都評議司)에서 내려온 송사가 있었다.

선생은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百官)의 차례를 정하여 실력 있는 자를 채용하고, 무능한 자를 채직하는 것이 재상의 직무이며, 법을 지켜 집행하는데 있어서는 각각 맡은 관원이 있으니, 일마다 묘당(廟堂)에서 간섭하는 것은 백관을 침해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송사(訟事)하는 자가 폭주(輻輳)하였는데, 선생이 판결하기를 처음에는 유의하지 않는 것처럼 하다가도 두 사람이 함께 와서 송사할 때에는 판결이 너무나도 정당하여 이긴 자나 진 사람이 다 공평하다고 하였다. 공민왕이 그를 가상하게 여겨 19년(1359) 3월에 영록대부(榮祿大夫)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초수(招授)했다.

동 20년(1360) 겨울에 공민왕이 남쪽을 순행하였는데 선생이 따라가 충주(忠州)에서 배알(拜謁)하였다.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인견(引見)하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동 23년(1363) 7월에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상호군(上護軍)을 제수하였으니 이는 그의 편의를 따른 것이다.

어진이를 가까이 착한이를 벗하다

동 25년(1365) 겨울에 병으로 사양하고 영주(榮州)로 돌아왔다. 동 26년(1366) 정월 23일 을사에 병으로 집에서 운명하시니 향년(享年) 62세이다. 영주 동쪽 10리 밖에 있는 선영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이해 겨울 12월 18일에 부인 우씨(禹氏)가 운명하여 선생과 부장(祔葬)하였다. 우씨는 영주(榮州)의 사족(士族)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따님이다.

선생이 평소 가산(家産)에 신경쓰지 않았고 세상의 공리(功利)에도 담박(澹泊)하였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부인도 살림의 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그때그때 주찬(酒饌)을 장만하여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을 벗하는 뜻에 순응하였다.

아들은 셋이다. 큰아들은 도전(道傳)으로 임인년(壬寅年, 136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지금은 선덕랑통례문지후(宣德郞通禮門祇候)에 올랐으며, 둘째는 도존(道存)이며, 셋째는 도복(道復)인데 모두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딸이 하나 있어 사인(士人) 황유정(黃有定)에게 시집갔는데 성균사예(成均司藝) 황근(黃瑾)의 아들이다. 손자는 진(津)과 담(澹) 둘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아들 도전이 삼가 행장을 쓴다.-

염의 선생의 묘

원나라 지정(至正) 26년(1366, 공민왕15)에 고려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 정선생(鄭先生, 鄭云敬)이 영주 사제(私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정월 을사일에 영주 동쪽 10리쯤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에 부장(祔葬)한 것이다.

그의 우인(友人) 성산 송밀직(宋密直)과 복주 권검교(權檢校)가 서로 의논하기를, “살아서는 자(字)로써 그 덕을 밝히고 죽어서는 시호(諡號)로써 그 절개를 나타내는 것이 옛 법이다. 그러나 벼슬이 시호를 받을 처지가 못되면 친우들이 사시(私諡)를 지어주었는데, 옛날 도연명을 정절(靖節)이라고 한 것이나, 서중거를 절효(節孝)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돌아가신 벗 정 선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빛나는 벼슬도 지냈으니 귀달(貴達)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집에는 여유 있는 재물이 없어 처자들이 춥고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것을 담담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염(廉)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친구가 환란을 당해도 몸소 그를 구원한 책임을 졌다. 그러나 의리(義理)가 아니라면 아무리 공경(公卿)의 세력이라도 보기를 하찮게 여겼으니 이것이 의(義)가 아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그 묘에 쓰기를 염의선생(廉義先生)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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