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색채 추상화의 대표작가

이두식(李斗植) 1947~2013

영주 최초의 사진관이었던 ‘영주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종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주초등학교와 영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여 서울예술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를 졸업했다.

홍익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생 시절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후, 한국 추상미술의 맥을 이어가며, 모교인 홍익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국내외에서 70여 회의 개인전을 연다. 국제적인 활동도 활발하여, 1993년 뉴욕 제리 브뤼스터 화랑(JERRY BREWSTER Gallery) 전속작가로 5년간 활동하였고, 2000년 이탈리아 로마의 지하철 플라미니오(Flamonio)역에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그의 그림이 벽화로 제작되어 국위 선양에 이바지하기도 했으며, 2005년엔 외교통상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미술행정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는데, 1995년 제17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외교통상부 미술자문위원, 예술의전당 이사 등을 역임한다. 그리고 홍익대학교 박물관장, 미대 학장을 맡으며, 2007년부터 지금까지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한국실업배구연맹 회장, 예술의 전당 이사, 서울메트로 미술자문위원장, 서울예고동창회장을 역임했고, 고향에서는 영주초등학교 100주년을 맞아 총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굵고 짧았다. 2003년 홍익대 정년퇴임 기념전 개막식을 마치고 그날 저녁 운명하고 만다. “이것만 끝내놓고 좀 쉴거야.”했던 그였다.

6.25전쟁 이듬해(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주영 전 시장, 왼쪽 두번째가 이두식)
6.25전쟁 이듬해(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김주영 전 시장, 왼쪽 두번째가 이두식)

작품세계-잔칫날, 오방색의 향연

그의 작품의 중추적 요인은 물감이 아니라 놀이의 감각이다. 놀이는 그의 작품을 리드미컬하고 흥겨우며 유머러스하게 만든다. 화면은 붓질이 춤추고 색깔은 흥겹게 아우성치며 형태들은 이리저리 꼼지락거린다.

마치 마당에서 사람들이 모여 동네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의 노래는 ‘원색’이, 춤은 ‘리드미컬한 운필’이, 흥겨움은 ‘물감의 겹침’과 ‘역동적인 구도’가 대신한다.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동인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작가의 낙천적인 놀이감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략-

중학교 2학년 때(앞줄 왼쪽 첫번째가 연극연출가 손진책, 둘째줄 오른쪽 세번째가 이두식)
중학교 2학년 때(앞줄 왼쪽 첫번째가 연극연출가 손진책, 둘째줄 오른쪽 세번째가 이두식)

하지만 이런 시각은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다. 무의식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몸의 느낌과 고동을 운필과 색채로 실어내는 것에 더 가깝다. 삶의 즐거움이 화면에 울려 퍼지도록 경주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 리드미컬한 운필, 강렬한 색채, 즉흥적인 필치 등이 충천한 감정을 한층 북돋아주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자칫 감성의 논리에 충실하다보면 엉클어질 수도 있을텐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러 요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손발을 맞추어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흥미롭기만 하다. - “이두식, 필선과 색채의 조화”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선미술상 수상식에서 미술평론가 유홍준과 함께(1988년)
선미술상 수상식에서 미술평론가 유홍준과 함께(1988년)

[유적지] 생가터와 그림

영주시 중앙로 135번길에 있던 그가 살던 영주사진관은 사라지고 병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집 앞은 중앙로이다. 늘 난전이 섰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건물만 늘어서 있다.

영주시가지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영남백화점 앞이었다. 비록 사진으로 새긴 것이었지만 언제 사라진 것인지 없다.

영주에서 그의 진짜 그림은 영주중학교에 가면 볼 수 있다. 모교의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며 잔치마당에 기증을 했다. 중앙 현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고향의 축제, 유채, 1935×160
고향의 축제, 유채, 1935×160

 

[미니픽션] 아직 끝나지 않은 잔치

울타리에 잠자리가 앉아서 떠날 줄 모른다. 나도 그냥 바라본다. 울타리 너머로 죽계가 보인다. 얼마 전에 온 비 탓에 황토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해마다 이맘때에 여기를 찾는다. 여기에 왔다 가면 다시 새 학기를 보낼 힘이 쌓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취한대(翠寒臺)로 가는 징검다리에 소녀들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영주의 곳곳은 내 힘의 원천이었다. 무언가 풀리지 않은 때, 영주를 찾았다. 영주의 친구들은 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한결같았다. 그리고 찾는 곳이 소수서원이었고, 구성공원이었다. 그해는 참 힘든 해였다. 가난했지만 예쁜 신혼을 보내던 시기였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던 해이기도 했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무작정 걷다가 온 곳이 구성공원이었다.

공원 기슭에 조그만 초가들이 매달리듯 닥지닥지 있던 때였다. 공원을 오르는데 초가집 마당에서 혼례를 치르는 모습이 보였다. 참 오랜만에 보는 꼬꼬 재배였다. 모두가 빛바랜 무채색이었던 시절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와 연지 곤지를 바른 새색시의 모습은 너무 예뻤다. 길 위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눈 속에 그려 넣었다. 당시 6·25전쟁으로 상처가 깊었던 때라 관혼상제 때 만나는 화려한 원색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거꾸로 밝은 빛을 살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풍경이 한동안 나는 떠나보낼 수 없었다. 빨리 화실로 돌아가 그 형상을 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돌도 안 된 아들이 급성 폐렴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다. 나의 어려운 사실을 전해들은 한 선배는 조심스럽게 상업 그림을 얘기했다. 이발소에 걸린 그림 같은 것이었다. 선배는 수출용이라고 애써 위로했다. 화가로서 자존심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하루에 대여섯 점, 출근해서 온종일 그림만 그렸다. 다행히 나에게 주어진 건 유트릴로, 시슬레 등 일류 화가의 모사품이었다. 가정은 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5년을 지나고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난시였고, 또 하나는 순발력과 집중력이었다. 빠른 구도를 잡는 방법은 그때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낮엔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았지만, 새벽엔 어김없이 내 삶을 찾았다. 이때 그려진 그림은 구성공원에서 만났던 풍경이었다. 그때 “생의 기원” 시리즈를 만들었다.

원래 우리 집은 무관 집안이었다. 하지만 일제를 거치며 가세는 기울었고 텅스텐 광산 개발에 뛰어든 할아버지 덕에 영주에서 터를 잡았다. 아버지도 그림에 대한 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님의 반대로 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진 기술을 익혔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매년 가을 서울 여행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국전(國展)이 열리면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늘 나를 데리고 나섰다. 아침 10시에 기차를 타면 저녁 5시는 되어야 청량리에 도착했다. 전차를 타고 창경원 근처 허름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종일 덕수궁과 비원을 돌았다.

그리고 관찰력과 손기술도 아버님이 넌지시 전해준 원판 수정작업이었다. 그 작업을 통해 명암이 어떻게 형태를 바꿔놓는지, 색의 미묘한 변화를 체험했다. 이때 난 아버님께 배운 기술로 리터치 작업을 해 보기도 했다. 필름에 연필을 살짝 묻히면 눈동자가 반짝반짝 살아나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졌다.

나이가 들어서 사천왕상처럼 얼굴이 우락부락해졌지만, 소년 시절의 나는 전혀 다른 용모였다. 지갑 속의 나의 사진은 부드러운 용모였다. 그래서 가끔 꺼내어 주변 사람들에게 소년 시절의 나를 자랑했다. 그것은 그 작업 덕분이었다. 난 뽀샵의 원조인 셈이었다.

이후 이 일들은 서울예고 입학시험장에서 효과를 보았다. 그해 데생 시험은 비너스상 그리기였다. 아이들은 모두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난 그 비너스 상이 처음이었다. 아니 석고상이 처음이었다. 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렸다. 비너스의 두상과 가슴 아래는 물론 석고의 밑받침까지 모두 꼼꼼하게 다 그렸다. 나의 비너스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얼굴이 아주 작은 이상한 비너스였다. 뒷날 그날 감독을 하셨던 선생님께 ‘그림이 재미있고 정직해서 후한 점수를 줬다.’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난 친구 복도 많았다. 그때 서울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 후했다. 광화문의 레코드 가게 올리버를 자주 들렀다. 가게는 새문안로를 건너는 육교의 남단, 옛 경기여고로 가는 길 입구에 있었다. 두 사람이 겨우 서 있을 만한 정도의 좁은 가게였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약속 장소로 애용되었다. 이두식, 송창식, 이장희, 소설가 최인호,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현경과 영애도 여기서 만났다.

서울생활은 나에게 늘 향수에 젖곤 했다. 그럴 때마다 냉면집을 찾았다. 을지면옥, 필동면옥은 단골이었다. 가끔은 의정부까지 냉면 순례를 하기도 했다. 냉면은 이북 음식인데, 영주에서는 냉면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풍기가 십승지로 소문이 나 많은 이북 사람들이 몰려왔다.

우린 일제시대에 영주에 왔지만, 6·25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온 수많은 월남민이 풍기에 정착했다. 그래서 영주는 주변에서 피란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지역이 됐다. 덕분에 그들이 가져온 냉면 문화로 냉면은 또 하나의 나의 향수였다.

그 무렵 난 더 분주해져야 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직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에서 박물관장으로, 학장까지 지내면서 책임은 더해 갔다.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은 정말 큰일 이었다. 하지만 매일 새벽 그림 그리는 일을 거른 적은 없었다. 그 무렵 큰일을 맡은 것이 로마 도심 포플로 광장 부근의 ‘플라미니오역’의 벽화 그림이었다. 가로 14m, 세로 2m의 대형 모자이크 벽화였다.

1996년 로마시는 우중충한 지하철 역내 분위기를 벽화로 바꾸고자 했다. 로마 시내 11개 지하철역의 벽화 제작을 위해 세계 9개국에서 27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작업하는 프로젝트였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고 했다. 이 작업은 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석적인 태도와 감성적인 태도. 분석적인 태도는 반드시 에스키스를 한다.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보통 미리 설계도를 그려보고 옮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린다. 직관에 따라 즉시 감정을 표현해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추상화를 주로 발표하니까 ‘이두식이는 추상화밖에 할 줄 모른다.’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관훈동 노화랑에서 ‘이두식의 소묘일기’라는 주제로 드로잉전을 열기도 했다. 드로잉은 기본 운동과 같이 모든 미술인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다. 자신의 이미지와 테마를 바로 옮길 수 있는 손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난 드로잉을 즐긴다. 하지만 이제 좀 쉬고 싶기도 하다. 내 목표가 1만 점의 작품이지만, 정년퇴임 기념전을 마치고 좀 쉬고 싶다. 소수서원도 가고, 구성공원도 오르면서 나의 친구들을 만나 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고 싶다.

※ 하지만 이두식 화백은 정년퇴임 기념전 개막식을 마치고, 그날 밤 타계하였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의 잔치는 우리들에게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글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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