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판서고택의 첫 번째 판서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삼판서고택(집경루) 1950년대 모습
삼판서고택(집경루) 1950년대 모습

10여세에 영주향교 입학 매번 수석해 복주(안동)향교로 월반
삼각산서 공부할 때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며 대의 깨우쳐
공정하고 밝은 안목,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으로 주변 놀라게 해

지금은 「삼판서고택」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판서댁(判書宅) 또는 삼판서댁(三判書宅)이라고 불렀다.

영주 사람들에게 “정운경이 누구냐?”고 물으면 “… …”이지만 “정도전의 아버지”라고 하면 “아! 정운경”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영천(榮川, 옛영주)에는 옛날부터 삼판서댁(三判書宅)이 있었는데 고려말의 정운경(鄭云敬) 판서가 그 사위에게 물려주니, 그 사위는 곧 황유정(黃有定) 판서요. 황 판서가 그 외손자에게 물려주니, 외손자는 곧 김담(金淡) 판서이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 판서 ‘정운경’은 누구인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정운경의 묘(아산면 신암리)
정운경의 묘(아산면 신암리)

정운경의 행장(行狀)

행장(行狀)이란 죽은 사람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글을 말한다. 행장은 고인과 생시에 두터운 친분으로 교유한 학식이 높은 벗이나 학문이 깊은 인사에게 부탁해 짓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지만 정운경의 행장은 아들 도전이 직접 썼다.

삼봉집에 보면 ‘아들 도전은 삼가 행장을 쓴다’라고 적었다. 이 행장은 정운경이 세상을 떠난 뒤 도전이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하면서, 아버지의 유품과 행적을 정리해 1369년경에 완성한 것이다. 행장은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高麗國 奉翊大夫 檢校密直提學 寶文閣 提學 上護軍 榮祿大夫 刑部尙書 鄭先生行狀(고려국 봉익대부 검교밀직제학 보문각 제학 상호군 영록대부 형부상서 정 선생 행장

본관(本貫) 안동부(安東府) 봉화현(奉化縣) 부(考)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균(均) 조부(祖父) 비서랑동정(秘書郞同正) 영찬(英粲) 증조부(曾祖父) 호장(戶長) 공미(公美)」

위는 봉화정씨 세계(世系)를 전해 주는 문헌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봉의 선대는 봉화를 관향으로 삼고 1200년대 초의 인물인 정공미로부터 계대(系代)가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공미의 생몰(生沒) 연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증손자인 정운경이 충렬왕 31년(1305)에 출생한 것을 기준으로 역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정공미(1215~1230生)→영찬(1245~1255生)→균(1275~1280生)→운경(1305생~1366졸)→도전(1342생~1398졸)

봉화정씨 시조공 제단소(가운데 시조 정공미)
봉화정씨 시조공 제단소(가운데 시조 정공미)

영주·안동향교서 매번 수석

삼봉집에 나타난 정운경의 어릴 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선생의 성(性)은 정씨이고 휘(諱)는 운경(云敬)이며, 자는 □□이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자랐다. 나이 겨우 10여세에 학문에 분발하여 영주향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복주목(福州牧, 安東) 향교로 월반하였다. 처음 향교에 들어갔을 때 여러 학생들이 매우 괄시하였으나, 매번 수석을 하였으므로 고을의 원들이 모두 우러러 귀중하게 생각했다.

외숙 한림(翰林) 안장원(安壯元, 장원급제 표시, 안분安奮)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와 공부를 하였는데,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십이도(十二徒, 열두사학)에서 합류하여 공부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여러 학생 가운데 유명해졌으며, 자라서는 한림 유공(劉公, 東美)과 문화찬성사(門下贊成事) 근재(謹齋) 안공(安公, 軸)에게 칭찬을 받았고, 가정(稼亭) 이공(李公 穀)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벗이(忘年之交) 되었다.

어느 날 가정 이공이 동방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선생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하므로, 선생은 기꺼이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길을 떠났으며, 영해부에 이르러 수년 동안 머물러 글을 읽었다. 또 간의대부 윤공(尹公 安之)과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었는데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였고, 대의를 깨우친 다음 책을 놓았다.」

봉화정씨 시조공 제단소 전경
봉화정씨 시조공 제단소 전경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

「병인년(1326, 충숙왕13) ☐월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지순(至順) 원년(1330, 충혜왕17) 10월에 송천봉(宋天逢)의 방(榜)에서 동진사(同進士)로 오르고 2년 정월에는 상주목(尙州牧)의 사록(司錄)이 되었다. 그때 용궁감무(龍官監務)가 뇌물을 받았다고 소가 접수되었는데, 안렴사(按廉使)는 선생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용궁현에 가서 감무를 보고는 묻지도 않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관리가 부정을 하는 것이 비록 나쁜 짓이지만, 그 역시 재주가 법을 농락하고 위엄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뇌물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감무는 늙어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무엇이 두려워서 뇌물을 주겠습니까?”하였다.

사람을 시켜서 이 사건이 무고인 것을 알고 난 후 안렴사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관리들은 모두가 까다롭게 따지는 것을 능사로 아는데 정사록은 정말 장자(長子)이다”하였다.」

정운경은 젊은 나이에 지방 관직에 나아가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는 한편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공정과 정의가 아니면 낙향

「이 고을 출신인 환자(宦者) 하나가 천자(天子 元皇帝)에게 괴임(뒤를 봐줌)을 받았는데, 사신으로 와서 상주에 들러 선생에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했다. 선생이 곧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니 아전과 선비들이 길에서 울부짖으며 울었다. 그러자 환자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밤에 용궁까지 뒤따라와서 이마에 피가 흐르도록 조아리고 사과하면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지순(至順) 3년 임신(壬申 1332) 4월에 전교(典校)로 발령받아 교감(校勘)이 되고, 지원(至元) 4년 무인(戊寅 1338 충목왕 복위7) 3월에는 주부(注簿)에 임용되었으며 윤8월 낭계(郞階)에 올라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를 겸하였다. 이때 원사(院使 다사茶事)를 맡은 원나라의 벼슬인 장해(張海)가 어향사(御香使)로 오는데 국가에서는 선생을 접반녹사(接伴錄事)를 위임하였다.

어향사는 강릉(江陵) 기생을 사랑하여 데리고 왔다. 선생이 들어가 공사를 이야기하는데도 기생은 뻔뻔스럽게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생이 꾸짖어 내려보내니 어향사는 성을 버럭 냈다가 얼마 후 사과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추하게 여겨, 그 직을 사면하고 돌아왔다.」

어향사에 바른말 훈계

동 5년 9월에 삼사도사(三司都事)로 옮겼다가 동 6년 10월에 통례문지후(通禮門祇候)를 제수받고, 지정(至正) 원년(1341, 충혜왕 복위2) 6월에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다. 그때 자급(資級)은 다 승봉랑(承奉郞)이었다.

2년 8월에 덕직랑(德直郞)으로 올라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이 되고, 동 3년 ☐월에 밀성군지사(密城郡知事)로 나갔는데, 이때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 사람에게 받을 빚이 있어서 어향사(御香使, 황제신임) 안우(安祐)를 통해 본군 밀성에 공문을 보내어 받아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묵살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밀성에서 영접 나간 아전이 어향사가 김해부(金海府)에 달려 들어가 교외(郊)까지 마중 나오지 않았다고 부사(府使)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는 빨리 달려와서 아전의 우두머리와 함께 들어와서 아뢰는 말이, “김해부사가 까닭 없이 욕을 당하고 있으니 지금 명(빚 받으라는 명)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욕을 당할지 모릅니다.” 했으나 선생은 듣지 아니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위태롭게 생각했다.

어향사가 군에 들어와서 인사를 나눈 다음 묻기를, “전번에 공문 보낸 일은 어찌 되었소”했다. 선생은 답하기를 “밀성 사람이 빚을 진 것이 있더라도 조상(조영휘를 가리킴)이 스스로 받을 일이지 상공께서 물을 일이 아닙니다.” 하니 어향사가 성을 내어 좌우의 사람으로 포위하게 하였다.

선생이 정색(正色)하고서, “이제 들 밖까지 마중 나와 즐겨 천자의 명령을 맞는데 어찌하여 나를 죄주십니까? 상공께서 덕음(德音)을 펴서 먼 지방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감히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어향사는 할 말을 잃고 그만두었다.

청백리(淸白吏)의 표상

선생께서 관직을 옮길 때는 공무로 밖에 있다가 고을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부임지로 떠났다.

그러자 밀성 사람들이 월봉(月俸)을 마땅히 행자(行資)로 드려야 한다고 가져왔으나 부인이 그를 받지 않았다.

동 4년 9월에 복주목 판관(福州牧判官)으로 옮겼는데 그 고을 호장(戶長) 권원(權援)은 전에 향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이었다. 부임하던 날 저녁에 술과 안주를 가지고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불러들여 같이 술을 마시며 이르기를, “지금에 내가 자네와 더불어 술을 마시는 것은 옛정을 잊지 않음에 있다.

만일 후일 그대가 범법 행위를 한다면 판관으로서 자네를 용서하지 않겠다”하였다. 친구들이 지어준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 그대로 정운경은 청백리(淸白吏)였다. 후일 정운경의 큰아들 정도전 역시 아버지를 닮아 청렴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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