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 가운데 매화를 가장 사랑했던 퇴계
​​​​​​​매화를 통한 기생 두향과 퇴계의 사랑과 이별

한-송이-꽃에-두-가지의-색깔이-나타나는-희귀종-'도지매'
한-송이-꽃에-두-가지의-색깔이-나타나는-희귀종-'도지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上有天堂),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下有蘇杭)’라고 한 절강성 서호에서 북송시대 시인 임포林逋(967∼1209)는 서호자매西湖紫梅라는 품종의 매화 300주를 심고 가꾸며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 삼아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를 남겼다.

그곳에 초막을 짓고 20여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고 살면서 그가 쓴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 가운데 “성근 매화나무 가지의 그림자는 비스듬히 옅은 물 위에 드리우고(疏影橫斜水淸淺), 은은한 향기는 달빛 황혼 녘에 풍겨오네.(暗香浮動月黃昏)”라는 매화에 관한 세기적 절창을 남겼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여행작가 마르코폴로(Marco Polo)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러한 임포의 삶을 흠모하고,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캐면서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던(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중국 남북조시대 시인이며 세칭世稱 화정선생靖節先生으로 알려진 도연명陶淵明(约365~427年)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전원생활을 갈망했던 것을 본받으려, 평생에 69번이나 나라에서 내려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도산에 돌아와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매화사랑에 흠뻑 빠졌던 조선시대 선비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그는 당시 선비들 가운데 매화를 가장 사랑하였고 스스로 ‘매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眞知梅人’이라고 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은 퇴계를 가리켜 매화를 혹독하게 사랑(酷愛)했다고도 한다.

도산매
도산매

퇴계가 매화 사랑에 빠진 까닭

퇴계는 도산서원 한적한 곳에 ‘절우사節友社’를 만들어 매화와 소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청정한 세계를 꿈꾸었으며, 서당의 이곳저곳에 매화를 심어 꽃이 필 때면 매화향이 가장 짙게 풍기는 밤 사경四更(1시부터 3시 사이)에 매화나무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한기가 들면 손수 고안해 만든 매화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 의자에 (숯불 화로를 넣고) 앉아 매향을 즐기기도 했다.

매화문 도자기 의자
매화문 도자기 의자

이슥한 밤 홀로 서당에 있을 때는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매화분과 마주 앉아 매화를 형이라 부르며(爲兄) “형님 한 잔, 나 한잔” 밤새 술 항아리를 비우는 선비다운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학사상 매화라고 하는 단일소재로 자필 자작의 매화시 85제 118수를 지었으며, 손수 만든 《매화시첩》(91수 등재)을 남기기도 했다.

20여 년 넘게 『퇴계학회』 회원이기도 한 필자가 1996년 도산매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고사하여 잘라 버린 채 둥치만 남아 있었다.

이제 다시는 도산매를 볼 수 없겠구나! 아쉽게 여기던 차에 일본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세계매화공원’을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 매화품종이 여섯종이 있었고 그 가운데 ‘도산매’가 있어 가지를 얻어와 분매에 접목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졌던 품종을 다시 보전해 갈 수 있게 되었다.

두산매 찾는 모습
두산매 찾는 모습

퇴계와 두향의 사랑

도산매를 생각하다 보니, 퇴계와 기생 두향이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퇴계는 그의 나이 48세 되던 무신년(1548)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안安씨의 성을 가진 두향杜香이라는 18세의 기녀妓女가 살고 있었다.

본관사또로 부임한 퇴계를 처음 본 두향은 그의 고매한 인격과 심오한 학문에 매료된 나머지 수청을 자청하였고 두향의 총명과 재주를 인정한 퇴계는 이를 용납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시화와 음률音律을 논하고 산수山水를 거닐며 깊은 정을 쌓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중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1550)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형제가 같은 지역에서 상하관계로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사직서를 냈으나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사정을 알고 그렇다면 이웃 지역인 풍기군수로 옮기게 하여 부임 후 아홉 달 만에 이직移職을 하게 되었다.

한편 퇴계의 곁에서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 오던 두향은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난다는 소식에 눈물이 솟구쳐 참을 수가 없을 만큼 커다란 고통과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이윽고 퇴계가 단양을 떠나야 했던 전날 밤 두 사람은 침통한 마음으로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퇴계가 이별의 시 한 수를 읊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死別己吝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 生別常惻測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나게 되었다. 기약이 없으니 몹시 두렵구나”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던 두향이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써 내려갔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며. 離別甚悲擧杯哀泣
어느덧 술 다 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於焉間酒盡恁亦去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花落鳥鳴春日何爲”

이날 밤의 한 많은 이별은 퇴계가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기나긴 이별이 되고 말았다.

강선대 위의 두향묘
강선대 위의 두향묘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

한편 퇴계를 떠나보낸 두향은 기적에서 탈퇴하여 관기에서 물러나 평소 퇴계와 함께 자주 찾았던 강선대 옆에서 매화와 난초를 기르며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던 중 인편으로 난초를 도산에 보냈다.

단양에 있을 때 함께 기르던 난초인 것을 알아본 퇴계는 두향을 만난 듯 어루만지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일어나 평소 자신이 즐겨 마시던 우물 물을 손수 길러 두향에게 보냈다. 두향은 이 물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정안수로 삼아 새벽마다 소복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퇴계를 위해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물이 핏빛으로 변한 것을 보고 퇴계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한 두향은 나흘 동안 걸어서 도산까지 갔다. 결국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먼발치에서 장례를 바라보고 나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강선대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를 부르며 강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거북바위 옆에 묻혔던 그의 묘는 충주호가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1985년 퇴계의 15대 손인 이동준李東俊박사의 주선으로 지금의 장회나루 건너편 강선대降仙臺 위쪽으로 옮겨졌다.

두향의 성씨가 안씨라고 전해오는 것은, 매년 가을 안씨 문중의 대표들이 10여 명씩 두향의 묘소를 참배하고 간다는 사실을 단양군청 재난관리과 행정선을 운행하는 당시 김병근 선장의 말에 의해 알 수 있으며, 퇴계가의 후손들도 해마다 두향묘를 찾는다고 하니 그토록 비천한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아픈 사랑의 인연을 감싸 안은 명문가의 매향처럼 향기롭고 덕망있는 따스한 인간애人間愛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퇴계는 좌절坐折하던 아침에도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命灌盆梅)는 말로써 우리에게 소소로움의 이치를 알려 주었고, “매일 매화나무에 물을 주는 것”으로 언행일치言行一致를 가르쳤다. 또한 그가 남긴 시 가운데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라고 하여, 매화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던 진정으로 매화를 아는 선비였다.

글 안형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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