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단 대표적 선승(禪僧), 서암(西庵)

서암스님(1917~2003)

서암 종정
서암 종정

속명은 송홍근(宋鴻根). 1917년 송동식(宋東植)과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3남으로 출생하여 풍기읍 금계리에서 살았다.

어머니 신씨가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거북이 나타나는’ 태몽을 꾸고, 친정인 안동 녹전으로 가서 출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으로 아버지가 투옥되었다가 탈옥을 하고 행방불명이 된다.

이후 왜경들의 감시와 압박에 못이겨 풍기를 떠나, 화전(火田)을 일구며 살아가며, 단양의 대강보통학교와 예천의 대창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1932년에 예천 서악사 화산(華山) 문하로 출가하여, 김룡사에서 낙순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37년 금오(金烏) 선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계하였다.

서암스님과 무위정사
서암스님과 무위정사

1938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40년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3학년을 마치고 중퇴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 1년 동안 대창학원에서 학생을 지도하다가, 1942년에 김룡사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고, 이듬해 봄부터 1년 동안 철원 심원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1944년 여름에는 금강산의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정진하며 병마를 물리쳤으며, 그해 문경 대승사의 바위굴에서 승려 성철(性徹)‧청담(靑潭)과 함께 정진했다.

광복을 맞이하여 예천에서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음 해 계룡산 나한굴(羅漢窟)에서 “나고 죽는 것은 본래 없다(本無生死)”는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물으면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서암스님과 봉암사
서암스님과 봉암사

1952년 이후에는 주로 문경 청화산(靑華山) 원적사(圓寂寺)에 주석하면서 1969년까지 계룡산 정진굴, 청화산 원적사, 속리산 중사자암(中獅子庵), 부산 범어사(梵魚寺) 금오선원, 태백산 각화사(覺華寺),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등 전국 각지를 오가며 한거(閑居)와 정진을 거듭하였다.

54세 되던 1970년에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원적사를 오고 갔다. 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 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했다. 62세 때인 1978년 이후로는 봉암사 조실이 되어 승풍을 바로 잡고 가람을 중창했으며, 일반인에게 산문을 통제하여 수행 환경을 정화했다.

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그리고 75세 대인 1993년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종정직과 봉암사 조실을 사임하고,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 봉화 물야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했다. 2001년에 봉암사로 돌아와 안거하다가 2003년 3월 29일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세수 87세, 법랍 72세였다.

조계종단 내 대표적인 선승(禪僧)으로 꼽히며, 출가한 후 참선에만 몰두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이 열반송을 묻자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암스님 법어집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그대, 보지 못했는가
꿈을 깨면 내가 부처
꿈을 깨면 내가 부처
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풀은 푸르고 꽃은 붉은데
풀은 푸르고 꽃은 붉은데

 

[미니픽션] 우문(愚問)과 현답(賢答)

21세기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조계종 종정을 하시던 스님께서 봉화 물야에 토굴을 마련해 사신다는 소식이 들렸다. ‘종정이면 가장 큰 어른이신데….’ 하는 이문도 들었지만, 가까이서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찾아나섰다. 그날은 추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귀성객인지 몇 대의 차량이 서벽 쪽으로 씩씩하게 달리고 있었다.

“큰스님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서산에 걸린 석양이라….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이 세상 사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한낱 개평꾼에 지나지 않지.”

“산중 생활에 불편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불편하지만 안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도 안 불편해요. 다만 늙으니 귀가 잘 안 들려서 불편한데 누가 보청기를 사다 줘 껴보니 오히려 그놈이 더 불편해. 그래서 그것마저 빼버렸지. 그냥 흐름대로 사는 거지.”

“무위정사(無爲精舍)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짓게 되었습니까?”

“내 나이가 되면 절은 이미 졸업했지. 그래서 조그마한 토굴이나 하나 지어서 살기로 마음먹었지요. 물론 부처님 말씀에 생사를 초월한 무위(無爲)의 세계와 근시안적으로 사는 유위(有爲)의 세계란 말이 나오긴 하지만 나는 그런 뜻으로 이름 붙인 것이 아니라 그저 ‘무위도식’한다. 그런 뜻으로 이름 붙였지요.”

“어릴 적, 풍기 금계동에서 올산(兀山)으로 언제 이주하셨습니까?”

“올산을 어떻게 알지? 도솔산 너머에 있었던 화전민 촌락인데…. 내가 7~8살 무렵 올산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그리고 단양 대광리라는 곳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는 상투 튼 어른들과 한 반에서 공부했지요. 단양에서 이태쯤 살다가 다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예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거기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고 정종덕, 권영달 선생님 등의 도움으로 대창학교를 다니게 되었지요. 반은 소사 일을 하면서 또 반은 수업받으면서도 제법 공부를 잘했으니 나도 둔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쑥스러운 듯 스님은 또 웃으신다. 한일합방이 되고, 풍기에서는 대한광복단이 결성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1921년 조직이 드러나 그 독립투사들은 서울과 대구 형무소에 투옥이 되고 거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스님의 아버지도 그 중의 한 분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부친은 탈옥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놈 순사들의 횡포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 올산이란 화전민촌까지 가서 살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불교적 가르침의 핵은 무엇입니까?”

“불교(Budda)란 한 마디로 ‘꿈 깨란 뜻’이라고 봐요. 인간이란 자기가 온 곳도 모르고 또한 가는 곳도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습득한 지식 몇 가지로 다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 꿈 깨고 정신 차리고 살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모태 속에서 열 달 동안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 이전에는 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데 도대체 뭘 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자신을 모른 채 항상 ‘취생몽사’의 상태에 있는데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이고 이것을 깨친 분이 바로 부처님이지요.”

“그러면 깨치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세상을 보는 범위와 안목이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똑같은 세상을 살아도 세계가 달라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깨달으면 세계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본 시대, 세계화 시대인데 미신이 너무 많아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이 언제인데 아직 미신이 너무 많아서 이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어요.”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한국은 사고도 1위 싸움도 세계1위예요. 무슨 무슨 자격증도 너무 많고 욕심도 많아요. 욕심을 버리고 자기 분수를 알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취하지 말고 전 생명체를 자기 몸처럼 살아야 해요. 향취가 나고 생사를 초월한 인생을 살 때 인생은 흐뭇한 법입니다.”

“불교종단의 분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큰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사양하시다가 오랜만에 젊은 사람들과 흥취 하셨는지 어렵게 대답해주셨다.

“종단분규의 뿌리를 알아야 해요. 그 뿌리 밑바탕에는 이승만과 미국이 있어요. 미국 사람의 정책은 약육강식과 문화파괴예요.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비구다 대처다 해서 조선 중들끼리 싸우게 한 것이 오늘날 종단분규의 원인이 되었어요. 미국이 6·25 때 한국 사람 얼마나 많이 죽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미국은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이승만을 내세워 별짓을 다 했어요. 나는 김구가 죽기 전에 이미 그가 죽을 거라는 걸 안 사람이에요.

인천 근방을 지나는데 ‘남북협상파 타도’라는 격문을 봤거든…. 미국 득 보는 것도 물론 있지만 한국은 지금 IMF라는 미국의 정책 고리개에 걸려 있어요. 옛날에는 땅을 뺏었지만, 요즘은 금융을 뺏어요. 전통문화가 붕괴하고 윤리와 도덕이 실종되었어요. 한국 정신이 없고, 산 기운이 없어요. 혁명적 기상과 한국적인 생기를 되찾아야 해요. 나는 비록 탈종(奪宗)은 했지만 중임을 포기한 적은 없으므로 앞으로도 종단화합을 위해 내 할 일은 할 생각입니다.”

“소백산 밑에 사찰 대불 공사가 많습니다.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중이 없으면 썩은 절이야. 논둑 밑에 천막 짓고 살아도 중다운 중이 있으면 절이고 아무리 호화로워도 중이 없으면 빈 절이야. 아도 화상은 선산 근처에 와서 머슴살이하면서 포교를 했지. 정신이 말하는 것이지 절이 말하는 것은 아니야.”

“최근 예천과 영주에는 들러 보셨는지요?”

“몇 해 전에 예천 문화원에서 불러 강연도 몇 차례 갔지. 그때 글씨를 써 달라기에 ‘민족정기’라고 써 주고 왔는데 아직도 그것이 대창학교에 걸려 있을 거야. 영주 불교대학에도 몇 번 간 적이 있지. 그리고 인걸은 지령(地靈)이라고 영주는 문필봉의 형상이라 글 잘하는 선비가 많고 예천은 인물봉이라 큰 인물들이 많이 나지. 문화하는 선생들이라니까 좋은 일 하는데 문화가 죽으면 그 나라는 끝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하길 바랍니다.”

한낮에 뵈었는데, 빗발이 오가는 탓인지, 날은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스님에게 나오지 말라고 인사를 드렸지만 마당까지 나오셔서 배웅을 해 주셨다. 스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조심스레 내려와 차에 오르며 스님께 미처 여쭙지 못한 말들이 밀려왔다.

“스님.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조용히 앉아서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곳이 바로 절이고 불교라고 하셨지요? 너무 평범해서 도로 모르겠어요.”

어쩌면 스님께서 그 화두로 또 몇 시간은 말씀해 주실 것만 같았다.
(참고자료, 영주문화 25호-2000년 가을)

글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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