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원산지는 중국 양자강 유역
​​​​​​​매화의 역사는 5,200년(기원전 3,230년)

해군사관학교 홍매
해군사관학교 홍매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의 양자강 유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도광경(陶宏景, 456∼536)은 그의 저서 《명의별록(名醫別錄)》에 “실생의 매화가 하천과 계곡에서 자란다(梅實生漢中川谷)”라고 기록하였으며, 이후 중국의 청나라 강희재(姜熙齊) 27년(서기 1688년)에 진호자(陳淏子, 1612∼미상)가 77세에 저술한 《화경(花鏡)》에는 “매화는 나부와 회계, 사명 등지가 본산이다. (梅本出于羅浮,會稽,四明等處")라고 하였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매화 하면 나부(羅浮)가 그의 고향이라고 알고 있으며 시인, 묵객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회자(膾炙)되고 있다.

19세기 초 영국인 크라크(Clarke)는 중국의 관동성 일대에서 매화나무의 표본을 채집하였고, 20세기 초 영국인 윌슨(E.H Wilson)도 호북지역 등지에서 야생매화의 표본을 채집하였다. 20세기의 3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의 식물학자들도 귀주, 복건, 강소, 절강, 호북, 광동 등지에서 야생매화의 표본을 채집하였다.

지리산 야생매
지리산 야생매

필자는 2006년 북경임업대학교 대학원장 장계상박사 팀과 함께 중국 서남부 라오스와 미얀마 접경지역인 귀주성의 여러 곳에서 야생매(野生梅) 조사 활동을 시행했다. 이때 수많은 야생매를 발견하고 자료를 채집하였으나, 우리나라 지리산 노고단 아래에서 발견했던 야생매로써 2007년도에 건국 후 처음으로 지정한 〈천연기념물제488호〉, <지리산야생매〉보다 규격이나 연륜에서 못 미치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북경임업대학원 초청으로 《한국의 매화》에 대한 특강을 했을 때, 우리의 지리산 야매를 소개하였던바 매화의 종주국인 중국의 학생들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며, 장박사는 한국에 오는 기회에 〈지리산 야생매〉를 탐매하겠다고 했다.

중국 매화의 역사 2500년

이러한 매화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1년에서 1976년 사이, 중국의 상해시 문물보관위원회가 상해의〈청포송택(靑浦崧澤)〉유적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식물의 씨앗에 해당하는 파편을 찾아내었고, 이를 절강농업대학 농학과의 초기 감정에 의하면 아주 딱딱하고 두꺼우며, 표면에는 작은 구멍이 넓게 분포되어 있어 야생매의 열매로 판명되었으며, 중국과학원 고고(考古)연구원이 방사능동위원소(C14)측정에 의해 판독한 결과, 그 연대를 기원전 3230년으로 추정하므로써, 지금으로부터 약 5200년전의 것임을 확정하였고, 2005년 무한에서 열린《제9회 중국 매화축제》때에는 세계적인 매화의 최고 권위자 북경임업대학교 첸준위(陳俊愉, 1917∼2012)원로 교수는 필자(안형재)를 비롯하여 덴마크 대표 앤더슨(Andersen) 교수와 이태리 대표 스치바(Tito Schiva)교수, 일본 대표 요시다마사오(吉田雅夫)교수, 대만 대표 유개주(劉芥柱)씨와 함께 가졌던 비공식 만찬 자리에서 중국매화의 역사를 5200년이라고 했다.

매화가 문헌상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6세기경 중국의 유명한 민요집인 《시경(詩經), 소남(召南)》편 가운데《표유매(標有梅)》에 보면

매실을 계속 던지니...............標有梅
그 열매 일곱 뿐이네...............其實七兮
나를 데려갈 선비는................求我庶士
혼인할 길일을 택하기를..........迨其吉兮

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 이는 혼기가 닥친 남녀 간에 애정 표현을 할 때 매실(梅實)을 사용했던 것으로서,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매실을 던져 의사를 표하면 남자가 허리에 찬 패옥佩玉을 건네주는 구혼의 방식으로 혼사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포유매
포유매

우리나라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등장

우리나라에 매화가 알려진 오래된 문헌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AD18∼27) 24년 8월에 “매화꽃이 피었다”라는 기록과,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3권 아도기라(阿道基羅) 맨 끝에 “모랑의 집 매화나무에 꽃을 피웠네.”라는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후기의 고승인 일연이 지은 이 시의 내용은 아도(阿道)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신라 21대 비처왕(毘處王, ?~500)(또는 소지왕(炤知王). 때,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고, 그 이전에 묵호자墨胡子도 모례의 집에서 숨어 살면서 불법佛法을 전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화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발전했던 시기는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심어 기르는 정매庭梅와는 달리 화분에 심어 기르는 분매盆梅는 특히 선비들을 비롯한 사대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 조일호의 「계매리어戒梅俚語」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한양 부귀가의 네 가지 유행 가운데 첫째는 매화분재라고 조선의 절개 있는 선비였으며 남포현감을 지냈고,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기록한 장편시 <반중잡영泮中雜詠>을 쓴 윤기尹愭(1741∼1826)가 말했는데, 그들 부귀가富貴家의 네 가지 사물은 매화분재, 비둘기 사육, 서가를 장서로 채우는 것, 그리고 취병翠屛이라고 하였으며, 취병이라고 하는 것은 관목류와 덩굴식물 등을 심어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 모양으로 만든 울타리로 한국 전통 정원의 한가지 형태를 말한다.

당시에는 조정에도 온실이 있어서 매화분재를 기르면서 화분 멀리에 숯불을 피워 은근히 열을 가함으로써 조기 개화를 촉진하여 “상께 올렸다”는 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은 분매를 일찍 꽃이 피게하기 위하여 너도나도 앞다투어 한지로 만든 매합梅閤이나 온실을 만들어 분매를 기르면서 이와 같은 온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화노花奴인 하인을 두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선대의 별장터였던 남산의 경성방송국자리에 커다란 「홍원매실紅園梅室」이라는 분매 온실을 가지고 있었고,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도 운현궁雲峴宮(지금의 종로구 삼일대로 460 옛 덕성여대 자리)에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정릉매
정릉매

조선시대 ‘분매’ 유행

어느 날 대원군의 사위로 성균관대사성과 이조참의를 지냈던 조경호趙慶鎬(1839~?) 의 형, 즉 대원군의 사돈인 조면호趙冕鎬(1803∼1889) 가 그 분매 온실에 들렸다가 자신에게는 그와같은 온실이 없어 매화 분재가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것을 듣고 강직하기로 소문난 사돈의 자존감을 상하지 않고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고심 끝에 ‘호매전護梅錢’이라는 명목으로 상당한 금전을 전달하여 온실을 짓게 하였다고 하며, 당시 가난했던 한 선비는 추운 겨울 분매가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은 홑바지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두꺼운 솜이불로 칭칭 감아 싸매어 주었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퇴계 이황도 자신이 거처하던 도산서당의 주위에 심고 가꾸던 매화가 혹독한 추위로 죽게 되자 하늘을 원망하고 매화의 원혼을 달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이웃 일본의 경우는 4세기경 중국으로부터 오매烏梅의 형태로 매화가 도래되었다는 기록과 901년(延嘉元年)에는 우메보시(梅干)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984년 일본 최고最古의 의서醫書인 《의심방醫心方》에 매실의 약용에 관한 기사가 있다.

필자와 함께 『매화 梅花 うめ』라는 책을 편찬하여 국내 우수도서로 선택되었고,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어 독일의 출판문화축제에도 출품하여 성과를 올렸던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李御寜(1934∼2022) 박사는 유럽연합과 같이 앞으로 한,중,일 3개국이 연합하는 때가 오면 그 중심지는 서울이 되고 상징하는 꽃은 매화가 될 것이라고 했었다. 의미 있는 말이다.

글 안형재 원장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