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 역사를 간직한 구산(龜山) 아래 ‘삼판서고택’

1780년 중수하여 1961년까지 구산 아래 있었던 삼판서고택의 모습(사진 : 1914년)
1780년 중수하여 1961년까지 구산 아래 있었던 삼판서고택의 모습(사진 : 1914년)

1300년경 정도전의 할아버지(정균)가 영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
두 번째 판서 황유정이 이 집에 살면서 ‘소쇄헌’ 현판을 걸어
1780년 김응련이 고택을 중수할 때 간옹 이헌경이 ‘집경루’라 해

구산(龜山)은 ‘삼판서고택’을 품은 성산(聖山)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다.

이 산을 성산이라 한 것은 구산 아래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고택의 건축 내력을 알아보려고 구산 아래 있었던 판서택 구지(舊址)에도 가보고, 이전 복원한 삼판서고택에도 여러 번 들러봤다. 또 『영주지』를 비롯한 여러 문헌 속에서 삼판서고택 관련 기록들을 찾아 이 고택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2008년 구학공원으로 이전 복원한 삼판서고택의 현재 모습
2008년 구학공원으로 이전 복원한 삼판서고택의 현재 모습

700년 역사 가진 고택

삼판서고택은 현재 영주에 남아 있는 고택(古宅)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고택의 외부는 동서 17m, 남북 23m이고 정침 10칸, 집경루 6칸, 외랑 9칸 등 25칸 규모의 ㅁ자집이다.

그 내력을 살펴보면, 이 고택에 살았던 첫 번째 판서는 정운경이다. 정운경(1305~1366)은 정도전의 아버지다. 그는 10세를 전후해 영주향교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 바 있다. 또 정운경이 1365년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영주로 돌아와 1366년 별세하자 정도전이 이 집에서 상을 치루고 아버지 묘소(이산면 신암리) 아래서 3년간 시묘살이한 내력도 삼봉집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의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봉화정씨(시조 정공미)가 봉화에서 살다가 정도전의 할아버지 정균(鄭均, 약1275~1280生, 공미의 손자) 대에 영주로 이주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정균이 장성해 영주로 이주하여 이 집을 지었다면 그 시기를 1295년~1300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삼판서고택은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로 보는게 타당하다.

삼판서고택 안채(정침) 대청에 걸린 '소쇄헌' 현판
삼판서고택 안채(정침) 대청에 걸린 '소쇄헌' 현판

집경루와 소쇄헌의 기록

지금 삼판서고택은 솟을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지만 구산 밑에 있던 원래 고택은 솟을대문과 담장은 없었다. 고택 앞에 서면 집경루(集敬樓)가 시선을 압도한다. 집경루는 모든 자손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조상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세 번째 판서 김담(金淡)의 후손 응련(應鍊, 1744~1801)이 고택을 중수(1879년)하면서 간옹 이헌경에게 청해 건물의 이름과 중건기를 지었으며, 현판 글씨는 예조판서 홍의호(洪義浩, 1758~1826)가 썼다고 전한다.

대문을 열고 안마당에 들어서면 건물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대칭를 이룬다. 6칸 대청 정면에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소쇄헌’이란 ‘쓸고 청(淸)하고 비운다’는 뜻으로 ‘선비는 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황유정이 노후에 이 집에 와서 살면서 ‘소쇄헌’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2008년 삼판서고택을 이건 복설할 때 이산 박기진(서예가)이 썼다.

대청마루에 걸린 시판

대청마루에 올라 벽면을 살펴보면 여러 장의 시판이 걸려 있다. 그중 정도전의 ‘산거춘일즉사(山居春日卽事)’란 시가 있어 자세히 살펴봤다.

一樹李花照眼明(일수이화조안명) 한그루의 배꽃은 눈부시게도 밝고/​數聲啼鳥弄新晴(수성제조롱신청) 산새들은 지지배배 갠 볕을 즐기네/幽人獨坐心無事(유인독좌심무사) 숨어 사는 사람 무심히 홀로 앉아/閒看庭除草自生(한간정제초자생) 뜰에 돋아난 새싹을 한가로이 보네.//

이 시는 임신년(1392) 봄. ‘정도전이 양이(量移) 되어 나주에서 영주 본가로 돌아와서 쓴 시’라고 삼봉집은 전한다. 즉 멀리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죄를 감등(減等)해 가까운 곳(영주)으로 옮겨와 고향 집에서 봄날 경치를 보고 지은 시이다. 정도전은 고향 집(구산 아래 삼판서고택)에 돌아왔으나 숨어 사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시로 보인다.

다음은 이 고택의 두 번째 판서인 황유정(黃有定)의 시판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偶携藜杖出柴扉(우휴려장출시비) 우연히 지팡이 짚고 사립문 나서니/四月淸和燕燕飛(사월청화연연비) 사월이라 화창한 날 제비들 쌍쌍이 날고/乘興往尋金氏子(승흥왕심김씨자) 불현듯 흥이 일어 김씨 아들 집 찾아갔더니/薔薇一朶秀疏籬(장미일타수소리) 한 떨기 장미화가 참 아름답구나//

이 시는 황유정이 삼판서고택에서 지은 시이다. 황유정은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친 후 관직에서 나와 낙향해 영주의 구산 아래 자택에서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곧 삼판서고택이다. 『영주지(괴헌고택본)』에는 ‘황유정이 문절공 김담에게 준 시’라고 기록했다. 위 시에서 김씨는 황유정의 사위 김소량(金小良)이고 아들은 김담(金淡)이다. 즉 김씨의 아들 집(삼판서고택)에 와서 이 시를 지어 김담에게 주었다는 뜻이다.

삼판서고택 동루(집경루)에서 선비 풍류 재연(2012)
삼판서고택 동루(집경루)에서 선비 풍류 재연(2012)

삼판서고택 중수기(重修記)

삼판서고택 건축 연대를 알아보기 위해 향토지를 비롯한 관련 문헌을 찾아보던 중 송지향의 「영주영풍향토지」에서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이 지은 집경루기(集敬樓記)를 발견하게 됐다. 집경루는 삼판서고택의 동루(東樓)이다. 기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천(榮川, 영주)에는 옛날 삼판서댁(三判書宅)이 있었는데 고려말의 정운경(鄭云敬) 판서가 그 사위에게 물려주니, 그 사위는 곧 황유정(黃有定) 판서요. 황 판서가 그 외손자에게 물려주니, 외손자는 곧 김담(金淡) 판서이다.

5~600년을 지내는 동안 여러 번 무너지고 보수하고 했으나 오직 동편 누각(樓閣)만은 아직 보존되는데, 몹시 퇴락하여 겨우 지탱하는 지경이라. 그 종중(宗中)이 힘을 모아 다시 세울 세, 경비 3백 량과 인부 2천여 명으로 2년에 걸쳐 준공했으니, 정침(正寢)과 외랑(外廊)을 합쳐 모두 25칸에 동루는 전보다 1칸을 늘렸으니 종중의 모임을 위함이었다.

루(樓)는 본래 이름이 없어, 종손 응련(應鍊)이 서울로 나를 찾아와 루의 이름을 청했다. 나는 듣고 기뻐하여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옛글에 고향도 공경한다 했거든 하물며 조상 문절공(文節公:金淡)이 정·황판서에게 물려받아 십여 대를 지켜왔음이 아니던가. 자손의 공경이 쇠하지 않아, 온 족친이 한마음으로 조상을 공경하는 정성에서 이룩했으니, 이는 어느 한 사람의 공경이 아니라, 모든 자손의 공경을 모았음인즉 어찌 ‘집경(集敬)’이라 이름하지 않을 것인가.”

라고 적었다. 이 기문은 『간옹집』에 있는 것을 송지향이 『영주영풍향토지(1987)』에 실었고, 최근 영주문화유산보존회에서 발간한 『영주의 기문(2019)』에 원문이 실려있다. 간옹 이헌경(본관 전주)은 대사간, 한성부판윤을 지낸 문신이요 학자다. 당시 중수를 주도한 종손은 김응련(金應鍊, 1744~1801)이다.

위 두 사람의 생몰과 당시 기록을 종합하면 1779년에 동루 중수를 완료하고, 1781년에 정침과 외랑의 중수를 완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40여 년 전 일이다. 우리나라 한옥의 경우 대부분 150년마다 중수했다고 하나 그 이전 중수기록은 찾을 수 없다.

판서댁-3판서구택

지금은 ‘삼판서고택’이라 부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판서택’ 또는 ‘삼판서구택’이라 했다. 1983년 영주시(시장 마용수)·영풍군(군수 백장현)이 공동 발간한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유적」편에 ‘삼판서구택’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 삼판서구택(三判書舊宅)은 구성공원 남쪽에 세워졌으며 거금(距今) 350여 년 전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 선생이 ‘영주군지(榮州郡誌)’를 편찬할 당시 이미 본 읍에서 유일한 고적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이 건물의 연대는 미상이다.

고려 충숙왕 때 봉화인(奉化人) 형부상서를 지낸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이 신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청렴결백하게 살다가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들 3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장남은 조선 개국 공신 삼봉 도전(三峯 道傳)이고, 차남은 참판 도존(道存), 삼남은 한성판윤 일봉 도복(逸峯 道復)이었으며, 사위는 평해인(平海人) 공조전서 황유정(工曹典書 黃有定)이다.

그 또한 3남 1녀를 두어 장자는 증 지평 전(贈持平, 銓)이고 차남은 문과에 등재한 제주 현(鉉)이며 삼남은 훈도 연(錠)이고 그 사위는 선성인(宣城人) 현감 김소량(縣監, 金小良)이다. 그의 아들 문절공 김담(文節公, 金淡)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니 따라서 이 구택은 형부상서 정운경에서 사위 공조전서 황유정에게로 또 다시 외손 이조판서 김담에게 전수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가족제도상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3공이 다 판서(判書)에 올랐으니 세인은 이 구택을 ‘삼판서구택’이라 부르게 됐다. 이 건물은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이었으며, 집터도 영천(영주) 고을에서 소문난 명당자리였다.

세 분의 판서를 배출한 집으로 조선 시대 때부터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이 고택은 정도전의 생가로 재조명되고 있다. 구산(구성공원)의 성역화 사업이 조기 발족되어 삼판서고택이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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