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군인 … 비운의 특전사령관

정병주(鄭柄宙), [1926 ~ 1989]

이산면 용상1리 배해마을에서 태어났다. 영주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안동농림학교 졸업 후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한다.

6.25 전쟁의 발발로 1연대 소대장으로 참전한다.

1967년 제1공수여단장, 1969년 특전사령부 제1특전여단장, 1971년 제5보병사단장, 1974년 대통령 경호차장에 보임되었으며, 1975년부터 특수전사령관을 지내다가 1979년 강제예편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장태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군사반란을 막아보려 했지만, 특전사령부 예하 부대장 박희도(1여단), 최세창(3여단), 장기오(5여단)는 이미 배신한 상황이었다. 결국 정병주는 그 부하들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며, 호위하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도 쿠데타군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그 후 그는 7년여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7년 11월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관훈토론회에서 12‧12사태에 대해 자신들을 미화하는 발언을 보고, 그동안의 침묵을 깬다, 그들의 부당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 국가를 찬탈하려 하다니….” 하지만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의정부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변사체로 발견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12월13일자 신문보도
12월13일자 신문보도

12·12사태(事態)

197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강제 연행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여 이를 사후(事後) 승인하도록 한 군사 반란 사건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사건 후,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된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가 군의 쇄신을 위한 내부개혁을 진행하며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자, 전두환 중심의 사조직인 하나회(신군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감행한다.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가 함께 참여한다. 이후 군부 세력을 장악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차례로 대통령이 된다.

당시 신군부 세력의 반대편에 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이산면, 10‧26 현장에서 대통령을 보좌했던 비서실장 김계원(전 육군참모총장)은 풍기읍 출신이고, 신군부 측의 황영시는 안정면 출신이다.

배해마을
배해마을

유적지

배해(舟海)

정병주 장군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다. 하지만 살았던 옛집은 없다.

충혼탑에서 935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2km쯤 가면 ‘새배미재’이다. 여기서 왼쪽 길은 ‘배해’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어르실’로 가는 길이다.

‘배해’는 여기서 500m쯤 가면 나타나는 산속의 작은 마을이다. 박봉산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동쪽의 내성천과 서쪽의 서천 사이에 있어,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듯하다 하여 ‘배해(주해 舟海)’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박봉산에서 옥돌을 캔다.’하여 마을 이름을 ‘옥돌 박(璞)・뫼 산(山)’자를 써서 ‘박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미니픽션] 그날, 생일집 잔치

“보고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달포가 넘게 부대를 지키고 있던 어느 날 전두환에게 온 전화였다. 아끼는 후배였다. 더구나 특전사를 후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그가 대통령 시해 수사에 대한 그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려니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김진기 헌병감은 벌써 와 있었다. 장태완 수도방위사령관도 뒤이어 합석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만나기로 한 6시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사령관님! 비상입니다. 총장님께서 납치되셨습니다.”

7시 30분이 좀 지난 시간이었다. 셋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도방위사령관과 헌병감 그리고 특전사령관, 모두 수도지역에서 전투병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말을 잊은 채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로 오자마자, 각 여단 지휘관의 위치부터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수도지역엔 네 개의 여단이 있었다. 3여단은 위례에 있는 특전사령사령부와 한 울타리 속에 있고, 1여단은 김포, 5여단은 부평 그리고 9여단은 부천에 있었다. 그런데 9여단장만 자리를 지키고, 1, 3, 5여단장은 순시 중이라고 했다. 든든했다.

모두가 자신들의 일은 알아서 잘하는 미더운 부하들일뿐더러, 식구처럼 키워온 자식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총장 밀어내는 불순한 세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두환?’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수사를 위한 단순한 연행도 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 외에는 누구도 명령할 수 없는 국가 계엄사령관이지 않은가?

세 장군이 함께 있을 때, 전두환은 청와대에 있었다. 대통령에게 계엄사령관의 체포를 재가(裁可)받기 위해서였다. 재가만 떨어지면 총장의 연행과 함께 가장 불편한 세 인물도 체포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완고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에게 정승화 체포를 명령하고 30경비단으로 갔다. 경복궁에 있는 30단은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이었지만, 단장이 전두환의 측근인 장세동 대령이었다.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은 이미 와 있었다. 이들과는 11월 중순부터 비밀리에 접촉하며 오늘을 기획했었다. 이날 거사의 암호명은 ‘생일집 잔치’였다.

“전 장군 대통령 각하의 재가는 났소?”
“아닙니다. 하지만 총장 연행은 성공했다고 막 보고를 받고 오는 길입니다.”

총장을 체포 소식 환호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긴장감이 돌았다. 아직 실제 병력을 가진 장태완과 정병주가 있었다. 그들도 지금쯤 현실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특전사의 세 여단장에게 자대(自隊)에 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3여단의 최세창에겐 특별한 지시를 했다.

“한 번 회유를 해 보시오. 그게 안 되면 제압하시오.”

그 시간쯤, 장태완은 정병주에게 전화를 했다.

“정 장군, 병력출동을 지금 바로 해야 하는데, 나에겐 현재 믿을 수 있는 병력이 없소.”

“예. 특전사 전 병력을 대기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난 한강 통제를 강구하겠습니다.”

통화하며 1, 3, 5 여단장이 마음에 걸렸다.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을 불러 여단장의 동태 파악을 다시 지시했다.

“단결! 3여단장입니다. 부대를 한 번 돌아보느라고….”

“아! 됐네. 지금 상황은 파악했겠지? 합수부 아이들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네. 가서 대기하고 있게.”

최세창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사령관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뒤, 비서실장은 1여단 병력 이동을 보고하였다. 자기가 가장 아꼈던 박희도의 제1여단이었다. 숨이 막혔다. 지난해 이세호 참모총장에게 사정사정하여 겨우 보직해임을 면하게 해 주었던 일이 떠 올랐다. 무장공비 3명이 1여단 지역 휘젓고 다니다가 임진강 너머 북으로 복귀한 사건이었다.

참모총장은 “제1특전여단이….” 하면서 노발대발했었다. 뒤이어 5여단과 9사단이 병력도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9사단은 노태우 소장이 사단장이었다. 정병주는 그제야 그림을 그리 수 있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관학교 후배들이었다. 즉시 9여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9여단장은 육사 출신이 아닌 갑종장교 출신이어서 그들과 연줄이 없을 것이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9여단의 출정과 10시에 수도방위사령부가 한강 다리를 통제했다는 소식은 ‘생일집잔치’ 측에도 들어갔다. 그들은 최세창에게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최세창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예하 부대 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에게 사령관 체포 명령을 내린다.

박종규는 김오랑 소령의 육사 2년 선배였다. 또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며 형제처럼 왕래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먼저 전화로 회유를 했지만 거절했다. 김오랑은 전화를 끊자마자 사령관실 당번병부터 모두 내무실로 보내고, 사령관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박종규가 사령관실에 왔을 때, 비서실엔 아무도 없었다. 사령관실 문을 열어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모두 몇 발 뒤로 물러섰다. 박종규는 손짓으로 사격을 지시했다. 모두 문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멈췄다. 조용했다. 박종규는 문을 젖히고 사령관실로 들어가다가 돌아섰다. 사령관실은 온통 피바다였다.

그 시간 윤성민 국방부 차관은 고민하고 있었다. 1여단과 9여단 때문이었다. ‘잔칫집’에서 두 세력이 부딪히면 큰일 난다면서 모두 물리자며 신사협정을 제의해 왔다. 윤 차관은 아군끼리의 전투를 걱정하며 9여단 병력을 원대복귀(原隊復歸)를 지시했다. 하지만 1여단은 계속 진군했다.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밤새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하지만 허락이 나지 않았다.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대동하고서야 받을 수 있었다.

노재현은 방송을 통해 정승화 참모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여했던 것이 판명되어 어젯밤 연행 과정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鄭鎬溶)이 수도경비사령관과 특전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이 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 정병주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섰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려고요?”
“아! 후배들이 좀 보자네. 금방 올 거야.”

그리고 이듬해 3월 4일 의정부 인근 야산에서 목매단 변사체가 발견된다. 정병주였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를 했다. 다섯 달은 짧은 날은 아니었다. 울창한 숲도 아닌 야산인데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리 굵지 않은 나뭇가지가 거구(巨軀)를 받치고 있었다.

고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고인의 무덤 앞엔 백비(白碑)가 서 있다. 어떤 사연도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유서도 하나 없는 죽음이었는데….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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