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龜山)의 역사와 변천, 구산-구성산성-구성공원

구성산성 전경(1914년), 성밑에 삼판서고택이 보인다
구성산성 전경(1914년), 성밑에 삼판서고택이 보인다

구산은 정도전이 태어난 삼판서고택과 동·서구대 등을 품은 성산(聖山)
구산 중심엔 가학루, 북 불바위, 동 향서당, 서 구호서원, 남 제민루

어릴 적 영주 하망동에 살았다. 국민학교 5〜6학년 때 친구들과 구성공원 아래 삼판서고택 앞을 지나 쪽박소(봉송대)로 가서 절벽 다이빙을 즐기며 놀았고, 구성공원에 올라 골프놀이 하는 구경을 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 교가를 불렀는데 ‘구성산 가학루의 어여쁜 정경’이 나왔다. 그래서 구성산과 가학루를 알게 됐다. 그 후 학창 시절 동안 추억 사진은 거의 구성공원에 가서 찍었다.

영주에 살면서 구성공원에 자주 오르긴 했지만 역사나 유적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세월이 흘러 교직 40년도 퇴직하고 향토사(鄕土史) 문을 두드린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최근 지인들이 ‘숨겨진 보물’을 찾아다니는 나를 보고 “구성(龜城)에 가면 숨겨진 보물이 많으니 노다지를 캘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구성산성남동방향, 멀리 철탄산이 보인다
구성산성남동방향, 멀리 철탄산이 보인다

계묘년 해맞이와 구산(龜山)

계묘년(2023) 새해에는 구산에서 보물을 캘 작정으로 해맞이는 구산(龜山)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간 구산에 올라 해맞이 장소를 물색해 봤지만 나무에 가려 동쪽은 아예 카메라를 들이댈 틈이 없다. 좀 더 멀리서 구산을 바라보면서 해맞이할 장소를 찾아봤다. 서구대에도 가보고 구학공원-구수산-부용대에도 올라 봤다. 그러다 구산의 전경이 잘 보이고 동쪽 하늘도 탁 트인 숭은전(崇恩殿)이 해맞이 장소로 ‘으뜸이다’라고 낙점 찍었다.

숭은전은 백성을 사랑하여 그들의 희생을 막고자 눈물을 머금고 천년 사직을 고려에 손국(遜國)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전(殿)이다.

구산은 정도전이 태어난 삼판서고택을 품고 있는 산으로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삼봉이 개경에서 벼슬살이할 때 1385년 봄 어느 날 경상도 안렴사(관찰사)로 가는 정부령 정홍을 전송하면서 “나를 위해 고향의 유민(遺民)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며 지어준 시(詩)에 ‘내고향 구산(영주 구성산)’이 나온다. “龜山桑梓邑(구산상재읍) 구산(龜山)은 내 고향(桑梓) 고을이 거니, 爲我訪遺人(위아방유인) 나를 위해 유민들을 찾아봐 주게.”라고 했다.

정도전은 또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民者國之本而君之天)”라고 했다. 새해 첫날 경순왕의 위민(爲民)과 정도전의 민본(民本)을 찾은 것만으로도 금맥을 발견한 듯 기대가 부푼다.

1950년대 구성에서 바라본 동구대와 서구대
1950년대 구성에서 바라본 동구대와 서구대

영주의 역사와 구성

취사 이여빈이 쓴 최초 『영주지』 「영천편」에는 옛 영천군(榮川郡, 영주의 옛 이름)의 연혁(沿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본래 고구려의 날이군(捺已郡),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 취했고 경덕왕이 내령군(捺靈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의 성종이 강주(剛州)로 고쳐 단련사를 두었고 현종은 길주(지금의 안동)에 귀속시켰다. 인종이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고치고 고종이 위사공신 김인준의 고향이라 하여 영주(榮州)로 고쳐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영락 계사년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예에 따라 영천(榮川)으로 고쳤다. 경태 정축년 세조 3년(1457)에 순흥부를 없애버리고 마아령의 아래요 물 동편의 땅인 부석과 수식과 곶천과 파문단의 네 마을을 잘라내어 본군에다 귀속시켰다『여지승람』. 군의 옛 이름은 구성(龜城)이다『여지승람』. 영주가 군이 된 것은 옛날 신라 때에 대도호였고 인물이 많이 났기 때문이다 『문헌 제민기』라고 기록했다.

위에서 주목할 것은 고려말 이미 영주(榮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여빈은 ‘영천군지’라 하지 않고 ‘영주군지’라고 했다. 그리고 영천군이 되기 전 옛 고을의 이름이 ‘구성(龜城)이었다’는 것과 영주가 군이 된 것은 ‘인물이 많이 났기 때문’이란 대목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때 ‘구성’라 불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송지향의 『영주영풍향토지』에는 ‘1413년 영천(榮川)으로 고치고 구성(龜城)이라고도 일컫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1413년 이 무렵 또는 그 이전에 ‘구성’이라고 불렀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1950년 불바위와 그 주변 모습
1950년 불바위와 그 주변 모습

구산(龜山)의 역사

취사 이여빈의 『영주지(1625)』에는 구산(龜山)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 사창 뒤에 있는데 우뚝하게 솟아올라 산을 이룬 것이 거북이 모양처럼 생겼다.

산 둘레 4면에 석성을 쌓았는데 성 가운데에 군의 창고가 있고 또 샘이 있다. 군의 옛 이름이 구성(龜城)이었던 것도 이것으로 인한 것이다. 산의 북쪽 모퉁이가 바로 화암(火巖, 불바우)이고 서쪽 모퉁이가 곧 동구대(東龜臺)인데 임천 하류가 제비꼬리처럼 갈라져서 그 서쪽을 고리처럼 안아 흐른다고 적었다.

또 『영천군지』에는 구산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을 남쪽 1리 쯤에 있다. 들 가운데 풀쑥 솟은 모양이 마치 거북이 엎드린 모습이다. 산둘레에 성을 쌓았으니, 영천 고을의 옛 이름이 「구성龜城」이었음은 이 때문이다. 성 가운데 옛날 창고터가 아직 있고, 그 북쪽 끝은 높고 낮은 바위가 솟아 드리운 모양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어서 「불바위火巖」라고 한다.

전하기를 뒷새마을(杜西村)에 화재가 잦은 것이 그 때문이라 하여 그 바위 아래 못을 파서 그 기운을 눌렀는데 뒤에 주민들이 메우고 논을 만들었던 바 1635년(인조13) 군수 이후기(李厚基)가 다시 못을 수축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구성산성(龜城山城)

『영주지』「구성산성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산 위에 있었다. 둘레는 1,281척 높이는 9척이었다. 성안에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 동서북 3면이 깎아지른 암벽과 냇물로 둘린 자연 조건을 이용하여 설치된 이 산성은 옛날 이곳의 군사적인 요지로 이용되었는데 임진왜란에 왜군이 웅거할 것을 염려하여 불사르게 했다『동국여지승람』고 적었다.

위에서 구성은 동서북 3면이 ‘깎아지른 암벽’과 ‘냇물로 둘린 자연 산성’이라고 했다. 지금은 서천 물길이 수로 변경으로 구수산(龜首山)을 끊어 직진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구성 3면으로 냇물이 흘렀다 하니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또 『경상도지리지(1425)』에 「石築 洪武甲戌始築」 이라고 적혀 있다. 즉 성은 돌을 쌓았고 홍무 갑술년(1393)에 시축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태조 즉위 2년이 되는 해로 국방을 튼튼히 하는 정책을 펼 때다.

당시 고려말의 어지럽고 미약한 사회를 바로잡아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으로 각 지방의 부군현에도 성을 축조토록 하였기 때문에 영주의 구성산성도 이때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성의 축조 양식으로 보아 고려나 삼국시대 또는 기원전 부족국가시대 때 쌓은 것을 이때 고쳐 쌓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구산(龜山)의 보물

산 이름을 구산(龜山)이라 한 것은 거북이 모양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거북 등에 해당하는 가학루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거북꼬리 형상을 하고 있는 큰 바위가 위태롭게 솟아있다. 사람들은 ‘불바위’라고 부른다. 그 모양이 타오르는 불꽃 형상이라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거북의 서편 기슭에는 옛 구호서원(鷗湖書院) 흔적이 남아 있고, 구산 동편 기슭에는 향서당(鄕序堂)이 있었고, 창고와 샘이 있던 자리엔 대은정(大隱亭), 삼맹와(三盲窩) 춘수당(春睡堂), 모명재(慕明齋) 등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구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절경은 서쪽 끝에 있는 동구대다. 동구대 위에는 봉송대(奉松臺)가 건립됐고, 냇가 쪽 바위 절벽 아래 쪽박소(沼)가 있었다. 그리고 물을 사이에 두고 서구대와 맞이하고 있다.

구산 남쪽은 얼핏 보면 밋밋한 산자락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골짜기가 있고 제비꼬리 모양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이 제비꼬리 중심부에 정도전이 태어난 삼판서고택이 있었고, 그 서편 냇가에 제민루(濟民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구학공원으로 옮겨 복원했다.

왜정 때 구성공원

‘구성산’을 ‘구성공원’으로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본래 구산은 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지 한복판이다. 이 산이 공원으로 지정되기는 1920년 무렵이다. 원래는 서천 물이 이 산의 서쪽 기슭 절벽을 감아 흘러 천석(泉石)의 절승(絶勝)이 고을에서 으뜸으로 꼽히던 곳이다.

1950년대 포교당 쪽으로 공원에 올라가면 현 춘수당 앞에 골프놀이 기구와 약간의 어린이 놀이시설(시소 등)이 있었고, 공원 정상 가학루에는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또 공원 남쪽 주인 없는 삼판서고택에는 난데없이 춤바람이 불어와 댄스교습소로 변신하는 등 고을에 새로운 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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