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주자 밀어주자 영주의 꿈

홍사덕(洪思德)[1943~2020]

순흥면 내죽1리 속수마을에서 홍난유(洪蘭裕)와 반남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흥국민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영주국민학교로 전학해 졸업했고, 영주중, 서울대 사대 부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1대(민한당)와 12대(신민당)에 영주에서, 14대(민주당)와 15대(한나라당)에 서울 강남구(을)에서 국회의원을 했고, 16대엔 비례대표(한나라당)로, 18대(새누리당)엔 대구 서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6선 의원이다.

정치 활동을 하며 민주당 대변인, 문민정부 정무장관, 16대 국회부의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을 역임했다. 지난 2020년 6월 17일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저서(著書)로 『새롭고 하나 된 조국에의 길, 나의 꿈 나의 도전』(1988)이 있다.

영주의 국회의원

제헌 국회의원 최석홍(소속 대동청년단, 선거일 1948년 5월 10일, 선거구 영주), 제2대 김정식(대한청년단, 1950년 5월 30일, 영주), 3대 이정희(자유당, 1954년 5월 20일, 영주), 4대 이정희(자유당, 1958년 5월 2일, 영주), 5대 황호영(민주당, 1960년 6월 29일, 영주), 6대 김창근(민주공화당, 1963년 11월 26일, 영주), 7대 김창근(민주공화당, 1967년 6월 8일, 영주·봉화), 8대 김창근(민주공화당, 1971년 5월 25, 영주), 9대 박용만·권성기(신민당·민주공화당, 1973년 2월 27일, 영주·봉화·영양), 10대 김창근·박용만(민주공화당·신민당, 1978년 12월 12일, 영주·봉화·영양), 11대 오한구·홍사덕(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 1981년 3월 25, 영주·영풍·봉화·영양), 제12대 오한구·홍사덕(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 1985년 2월 12일, 영주·영풍·봉화·영양), 13대 김진영(민주정의당, 1988년 4월 26, 영주·영풍), 14대 금진호(민주자유당, 1992년 3월 24일, 영주·영풍), 15대 박시균(무소속, 1996년 4월 11일, 영주), 16대 박시균(한나라당, 2000년 4월 13일, 영주), 17대 장윤석(한나라당, 2004년 4월 15일, 영주), 18대 장윤석(한나라당, 2008년 4월 9일, 영주), 19대 장윤석(새누리당, 2012년 4월 11일, 영주), 20대 최교일(새누리당, 2016년 4월 13일, 영주·문경·예천), 21대 박형수(국민의힘, 2020년 4월 15일, 영주·봉화·영양·울진)

분수대 앞(1960년대)
분수대 앞(1960년대)

[유적지]
·분수대

지금은 분수대이지만 예전엔 작은 상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삼각지(三角地)였다. 삼각지의 북쪽에 홍의원의 부친이 운영했던 세탁소가 있었다.

홍사덕추모비 제막식(2020년)
홍사덕추모비 제막식(2020년)

·홍사덕 추모비

‘홍사덕 추모비’ 제막식이 지난해 6월 17일 순흥면 내죽리 고인의 생가터에서 열렸다. 이날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추모사에서 “총리라도 한 번하고 갔으면 지금처럼 국민이 둘로 쪼개져 다툼이나 일삼는 나라는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추모회 측은 생가터를 정비하여 추모비를 건립했고, 향후 고인이 남긴 다양한 역사적 자료 등을 보존하기 위해 추모관도 건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니픽션]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며

“홍사덕 사망 숙환으로 별세”

16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이 지난 17일 오후, 향년 77세 나이에 숙환으로 별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정치 활동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조화가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다는 게 더 눈길을 끌 뿐, 노정치인 하나가 죽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그의 이름 석 자에 한동안 멍하니 있어야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방학이었지만 고향을 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리다가 설이라고 귀향을 했었는데, 영주는 국회의원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다. 두 명의 입후보가 당선되는 중선거구제로 치르는 것이라서 누가 붙고 떨어지는 것보다 야당 후보로 나선 30대 젊은 사람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학교 앞 세탁소집 아들이잖아.”

“맞아. 형편이 어려워서, 서울서도 거의 고학을 했다던데….”

“인물도 참 잘 낫고, 똑똑하고…. 그런데 선거 운동하려면 돈도 좀 있어야….”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카더라. 친구들도 똘똘 뭉쳤고, 서울서 온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라고 하던가, 뭐라던가…. 잘 돌아간다 카더라.”

선거 사무실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여관이었다. 우리 집과 별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주변을 돌았다. 멀리서라도 지나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기덕아! 추운데 거기서 뭐하노?”

시내에서 장사하는 작은집 아저씨였다. 여관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여관 중앙에 있는 복도가 사무실이었다.

“사덕아. 안 그래도 자네한테 인사시킬라 했는데…. 우리 큰집 조카다. 야도 서울서 대학에 댕긴다.”

아저씨는 “야! 뭐 하노 인사 안 하고…” 하며 나를 끌어당겼다. 홍사덕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나를 보더니 악수를 청했다. 밝은 미소도 부드러웠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길은 더 따뜻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방학이 끝날 때까지 작은집 아저씨를 따라 다녔다.

개학 후,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주에서는 1등을 했는데, 봉화와 영양에서 표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2등을 했다고 하였다. 난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해병대를 자원입대했다. 그 이유는 홍사덕이 해병대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군대 제대를 하고, 복학을 준비하며 영주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영주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학교 안이 시끌시끌했다. 무슨 체육대회를 하는 것 같았다. 현수막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충정회가 영주를 빛낸다.’라는 내용의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회자가 홍사덕을 단상으로 안내를 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회의원! 홍사덕 의원님께서 한 말씀 하시겠습니다.”

홍사덕은 단상에서 멋진 자세로 주위를 압도했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북쪽 하늘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 홍사덕 여러분의 힘으로 저길 갈 겁니다. 푸른 지붕이 있는 곳, 그곳이 내가 갈 곳입니다.”

운동장 안은 그 말 한마디에 박수와 함성으로 꽉 찼다. 나도 정신없이 홍사덕을 연호하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취업 준비다 뭐다 분주한 나날을 보냈지만, 선거 때만 되면 늘 나의 한쪽은 선거판에 가 있었다. 서울 강남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고, 삼당 합당을 거부한 몇이 소위 꼬마민주당을 하는데,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과 박찬종도 함께 한다는 보도도 TV에서 보았다. 그리고 민주당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합류하여 제14대 국회의원에서 당선될 즈음엔 회사 일에 떠밀려 응원을 제대로 못 할 때였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무소속으로 있던 홍의원이 김영삼 정부의 정무장관으로 입각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여당 의원도 아닌 무소속 국회의원을…. 그래서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문민정부가 사람 참 잘 쓴다며, 영주 출신이라며 자랑을 했었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던 것이 “키워주자. 밀어주자.”라는 문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동료의 집들이하러 갔었다. 마포에 있는 아파트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친구 부인이 대뜸 나에게 홍사덕을 아느냐고 물었다. 왜 그러는가 싶어서 머뭇거렸다.

“이야기하는 악센트가 너무 닮아서 그래요.”

“당신 몰랐어? 이 친구가 홍 의원님과 동향이잖아. 친구야. 우리 마눌 완전 팬이야.”

그 무렵 서울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 고정으로 출연하는데, 말씀도 재미있어서 정치하는 분이 전부 홍 의원님 같았으면 좋겠다고 하며, ‘며칠 전엔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하며 전해 주었다.

“서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우리보다 못한 이웃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베풀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나와는 다른 생각과 신념을 허용할 줄 아는 마음, 이 세 가지는 21세기를 담당할 세대들의 선도적 역할이 있을 때만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래요. 홍 의원님 말씀이에요.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우리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난 건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이전의 한반도 역사는 굶주림과 기아와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 고유의 역사를 이어온 힘은 바로 사랑이었다. 베풀 줄 아는 마음이 민족공동체를 유지하게 했고, 국난의 위기 때마다 함께 떨쳐 일어나게 했다. 참 맞는 말씀이잖아요? 정말 홍 의원님이 시장님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날 술자리는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괜히 홍사덕의 말투로 얘기하려고 노력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뒤. 서울시장 공천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노무현 탄핵안을 통과시키며 진두지휘하는 모습도 보았지만 홍 의원님이 괜히 그럴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푸른 기와집을 가실 분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 후 국회부의장을 하신다고 했고, 종로구에 출마하셨다고 했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자리에 가서 봉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2022년 6월 17일. 2주기를 맞이하여 추모비를 건립한다고 한다. 이제 나도 퇴직을 한 터라 마음 편하게 참석을 했다. 건립 장소는 그의 생가터라고 한다. 많은 분이 오셨다. 김덕룡, 김을동, 장윤석…. 국회의원을 지낸 이들만 해도 많았다. 추모사 중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했다는 김정남은 이런 말을 했다.

“홍사덕 부의장님이 총리쯤은 한 번하고 가셨으면 지금처럼 국민이 둘로 쪼개져 다툼이나 일삼는 나라는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들이 함께살아 가는 사회를….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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