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사 지킨 마애삼존불과 밭에서 발굴한 석조여래좌상

마애삼존불상과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흑석사 상단부 모습
마애삼존불상과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흑석사 상단부 모습

절 맨 꼭대기에서 천 년 동안 절 지킨 부처님, 마애삼존불상
반쯤 묻힌 석불, 이산면 장정들이 목도로 삼존불 앞에 안치

삼국시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고구려:372, 백제:384, 신라:417〜458)된 이후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찰들이 존재했을까. 어떤 기록에는 8만4천 개가 있었다고도 한다.

흑석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어 사세를 유지했으나 조선 시대 폐사되어 ‘절골’이란 지명만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절은 없어져도 절 주변 흑석·야곡·샘골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역사는 전해지고 있다. 그 많던 절이 왜 없어졌을까.

조선 초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우수수 폐사됐고, 조선 중기 이후엔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 도저히 살 수 없어 스님들이 떠나 폐사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 빈대는 조선 시대 때 척불(斥佛)로 인한 탄압과 수탈을 견디지 못해 폐사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영주에도 큰 절이 참 많다. 그래서인지 영주의 국보 7점 중 6점이 불교 문화재이고, 불교 관련 보물도 15점이 있고, 도지정문화재도 22점이나 된다.

마애삼존불상 앞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마애삼존불상 앞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흑석사 관련 기록

흑석사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흑석사(黑石寺)는 군(영천) 남쪽 15리에 있다’고 한 것으로 봐서 16세기에는 사찰이 유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의『백암선생문집(栢巖先生文集)』에는 1574년 그가 흑석사에서 공부했다고 밝히며, 절의 위치가 군(郡:영천) 동쪽 칠성산 북쪽 기슭에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역사를 기록한 이여빈(李汝 :1556~1631)의『취사집(炊沙集, 용사록)』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경에서 예천을 거쳐 감천까지 진격해 왔으나 안동으로 방향을 돌리는 바람에 영주지역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고 군민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난 갔다’고 했으며, 친구 ‘민흥건(閔興建)이 1581년 역병을 피해 흑석사에 있다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영주 출신의 문인인 김시빈(金始鑌:1684∼1729)의『백남선생문집(白南先生文集)』에는 그가 1725년경에 흑석사를 유람하고 남긴 ‘맏형을 모시고 흑석사에서 노닐다(陪伯兄遊黑石寺)’와 ‘흑석사에서의 겨울비(黑石寺冬雨)’라는 시가 전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인 18세기까지는 흑석사의 사세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봉산 일출 무렵 광채를 발하는 석조여래좌상
박봉산 일출 무렵 광채를 발하는 석조여래좌상

마애불과 석불의 존재

흑석사 제일 높은 곳에 마애삼존불상과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절집 마당 가에는 석탑과 광배, 대좌 등 부재들을 모아 작은 탑을 쌓아놓기도 했다.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1900)』에 보면 흑석사 폐사를 언급하며 마애불과 석탑, 석불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마애불상의 높이는 7척(212.1cm), 폭은 3척7촌(112.11cm), 석탑은 높이 9촌, 폭 2척4촌, 석불은 가슴 아래가 모두 땅에 묻혀 있고 폭이 2척5촌의 좌상이라 하였다.

이후 흑석사는 『사탑고적고』에 나타난 것처럼 석불좌상이 땅속에 반쯤 묻힌 상태로 남아 있는 빈터로 있다가 1945년 초암사 주지로 취임한 초암당 김상호(草庵堂 金祥鎬:1895~1986, 이하 상호) 스님에 의해 1950년대 초 ‘영주포교원’으로 중창되었다.

영주 향토사에 의하면 1948년 소백산 일대에 출몰한 빨갱이(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소백산 일대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상호 스님이 초암사의 목재를 가져와 흑석사를 중건했다고 전한다.

소박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마애삼존불상
소박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마애삼존불상

석불좌상 발굴한 상호스님

흑석사 중창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진홍섭(미술사학자:1918〜2010) 선생의 「신라북악 태백산 유적 조사보고」에 따르면, 1960년 3월 당시 흑석사를 중건하고 있던 한 노파의 말을 빌어 ‘1953년 현몽을 받아 석불(보물 제681호 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을 발굴하였다’고 했다. 여기에 나오는 노파는 상호 스님으로 추정된다.

상호 스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시다. 흑석사 내 상호 스님의 비문이 있지만 흑석사에서 활동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흑석사 앞산 넘어 사는 샘골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흑석사에서 제일 높은 곳에 모신 석불은 아주 옛날 ‘삼국시대 때 조성된 불상’이라고 마을 선대 어르신들이 상호스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면서 “당시에는 호분을 발라 흰색의 부처님이었다. 이 석불은 종각 앞 밭에 반쯤 묻힌 상태로 발견됐는데 상호 스님이 삼존불 보호각을 짓고 나서 이산면 장정들을 불러 모아 목도로 불상을 들어 올려 ‘마애불삼존불 앞에 모셨다’는 이야기는 마을 어르신께 들었다”고 말했다.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석조여래좌상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석조여래좌상

박봉산을 바라보는 마애삼존불

수년 전 기자는 마애삼존불 앞에서 젊은 사학자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40대로 보이는 이 학자는 자신을 밝히진 않았지만 교수로 보였다. 그는 “삼존불이 박봉산(璞峰山)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후 박봉산 공부를 조금 해봤다.

지금은 박봉산이라 부르지만 삼국시대 때는 봉산(烽山)이라 했고, 대동여지도에는 「영천 동쪽10리 지점에 봉산이 있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奈解尼師今 二十九年秋七月 伊伐湌連珍 與百濟戰 烽山下破之殺獲 一千餘級/내해이사금 29년(224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 하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명을 살육하거나 포획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사는 1800년 전 기록으로 불교가 전래 되기 전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박봉산과 마애삼존불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마주 보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한 뭔가(신과의 교감?)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흑석사 절집 사람 중 한 분은 “아침 해가 박봉산에 떠오르면 삼존불이 광채를 뽐낸다. 볼만한 광경”이라고 했다. 기자가 지난 12월 25일 새벽 삼존불 앞에서 해맞이를 했다. 박봉산 동편에서 눈부신 해가 떠오르자 삼존불이 서서히 광채를 빛내면서 온누리를 향해 미소 짓기 시작했다.

흑석사 마애삼존불상

마애불(磨崖佛)이란 자연 암벽, 구릉, 동굴 벽 따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이 마애삼존불 역시 암벽에 삼존불이 조성돼 있다. 흑석사는 오랫동안 폐사되었지만 맨 꼭대기에서 절을 지키고 있었던 부처는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상이다.

흑석사에는 상호스님이 초암사에서 업고 온 아미타불은 국보로 지정됐고, 상호스님이 반쯤 묻힌 석불을 들어 올려 안치한 석조여래좌상은 보물로 지정돼 있어 마애삼존불상(경북문화재자료 제355호)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흑석사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부처이다.

흑석사를 중창한 상호스님도 6.25 전란 중 이 마애삼존불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여기가 ‘흑석사지’라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삼존불은 석조여래좌상의 배경을 자처하며 흑석사를 굽어살피고 있다. 높이 6m가량의 검은 돌이 앞으로 튀어나온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본존불과 협시보살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이하게 얼굴 부위만 조각되어 있고 아래는 윤곽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원형이 유지되어 있고 소박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선의 표현 등에서 그 제작연대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흑석사 석조여래좌상

이 석불은 1953년 상호스님에 의해 발굴되어 삼존불 앞에 안치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81호)의 높이는 163cm의 크기로 현재 마애삼존상 전면에 마치 본존불처럼 봉안되어 있다. 얼굴에는 양감이 적절하고 전체적으로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어깨가 약간 움츠러들었고, 무릎 쪽이 좁아진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은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양발 앞에서 부채골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전체적인 상태는 좋지만 목부분은 부러져 다시 보수했으며 코끝, 두 귀, 두 손, 무릎도 파손되어 수리된 상태다.

대좌는 8각으로 상대석은 없고 중대석과 하대석 부재들만 사찰 전면 방향에 흩어져 있는데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광배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구분해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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