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영주의 국회의원

우봉(友峰) 김창근(金昌槿)[1930~1991]

1930년 10월 22일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에서 김석원(金奭源)과 안동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주농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민주 학생연맹을 결성하여 우익 청년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필리핀 국립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수학했다.

1963년부터 영주에서 제6대, 제7대, 제8대 국회의원을 했다. 1972년 10월 유신을 반대하다가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그리고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4선 의원이 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나, 1980년 11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 활동 규제 대상자가 되었다.

경북선 개통(1966년)
경북선 개통(1966년)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 발족에 참여하였으며,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으로 민주화 투쟁에 이바지하였다.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풀려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했다. 1987년 김영삼이 신한민주당을 탈당하고 창당한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 12월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1990년 3월까지 재직하였으며, 한국에 고속철도(지금의 KTX) 도입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었다. 장관 임명 당시 야권 쪽 인물이라 화제가 되었으며, 비 5공 인물임을 자처하였다. 또한, 이때 노태우와 김영삼 간의 가교 구실을 하여 3당 합당 성사에 이바지하였다.

1991년 8월 1일 미국 뉴욕주 옷세고 카운티(Otsego County) 워체스터(Worcester) 메디컬 센터(Medical Center)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하였다. (출처 디지털영주문화대전, 나무키키)

연초제조창 기공식
연초제조창 기공식

새로운 영주의 건설

1961년 ‘영주대홍수’ 이후 영주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천 하천직선화공사, 수재민들을 위한 공영주택 건립 등 수해복구 사업도 큰일이었지만, 수마(水磨)가 핥고 간 빈자리도 채워야 했다.

그때 등장한 30대의 젊은 국회의원이 김창근이었다. 그는 새로운 영주를 만드는 역사(役事)를 주도했다. 1964년 철도국 이전과 1974년 영주지방철도청 승격, 1970년 영주연초제조창 준공, 1971년 영주경상전문학교(경북전문대학교) 설립, 1973년 영주역 이전 등 모두 그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세무서, 국토건설국, 대한석탄공사 임무소, 상공회의소 등 많은 관공서가 영주로 이전한 것은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영주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영주군이 영주시가 되는 기틀이 그때 만들어진다.

영주제조창과 영주시가지
영주제조창과 영주시가지

유적지

영주연초제조창(현 148아트스퀘어)과 영주지방철도청사

많은 일을 한 김창근이었지만, 영주엔 그의 기념비 하나 없다. 단지 그 흔적만 있을 뿐이다. 1964년에 영주로 가져온 철도국과 1970년에 준공한 영주연초제조창이 바로 그의 중요한 치적으로 이야기되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라지고, 옛 영주연초제조창은 건물만 남아 ‘148아트스퀘어’라는 이름을 걸고 영주 예술의 제조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주철도국 개국 현판식
영주철도국 개국 현판식

[미니픽션] 야당과 여당

“뭐라고? 잠깐만…”
전화를 받으며 현관문을 나갔다.

“뭔 말인데? 의원님이 우에 되셨다고?”
“지난 여름에 돌아가셨단다. 나도 이제 막 들었는데, 거참…. 자넨 아니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진짜…. 누가 그러던데?”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하더라. 그런데 오늘 집들이하는 모양이지? 축하하네. 이제 원 풀었네.”

‘원 풀었다.’는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지난 20년 참 악착같이 살았다.

“시국이라 했나? 아버님 근력은 좋으시고?”
“네.”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옆에서 있던 비서에게 제조창에 일자리 만들어주라고 했다. 비서는 명함 뒷장에 ‘김시국’이란 이름을 적어서 주었다.

“제조창에 전화 넣어둘 터이니, 제조창 총무과장한테 가보소.”

그날 공설운동장에서 김창근 국회의원의 선거 유세가 있었다. 공설운동장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네들이 관중석을 꽉 메우고 있었다. 영주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봉화와 예천, 안동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김창근 의원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박정희 대통령을 보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내려오자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대통령은 헬리콥터에서 내려 단상에 오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김창근 대변인은 나의 입입니다. 그래서 조석으로 늘 만나야 하는 국회의원입니다. 내가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와!”하는 환호가 운동장 전체를 휩쓸었다. 그리고 헬리콥터를 타고 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장면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1971년에 있었던 선거는 박용만 후보의 일전이었다. 영주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기는 참 힘든 일이었지만, 인물론을 내세우는 박용만 측의 도전은 거셌다. 거기에다 며칠 전 영보극장 뒤편 마당에서 야당의 거두들이 내려와서 합동 유세를 하고 가면서 김창근이 위태롭다는 말까지 나온 터였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모든 걸 뒤집었다.

유세가 끝나고 선거사무실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사무실로 들어서는 국회의원을 따라 들어가 인사를 드렸더니, 바로 그랬다. 네가 시국이냐? 아버님 평안하시냐? 그리고 바로 취직시켜 주셨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서는 나에게 한마디 했다.

“내일 기다리지 말고, 오늘 바로 가게. 그리고 악착같이 살게!”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연초제조창으로 바로 갔다. 총무과장은 명함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일거리를 주었다.

“기술은 차차 배우고, 월남전 참전 용사이니까, 경비는 잘하시겠네.”
하면서 경비실로 안내했다.

참 악착같이 살았다. 제조창과 남부국민학교와 전문학교, 큰 건물만 덩그렇게 있을 뿐 주변은 논바닥이었다. 영주역도 지어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운영은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전 등 굵직한 일들이 있었지만, 신영주는 아직 비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게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같이 이 말을 머릿속에 입력시키며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출퇴근했다.

“새 역사 창조”
나에게는 모든 게 새로운 역사였다. 눈 앞에 펼쳐지는 신영주도 새로운 역사였고, 나의 월급으로 세 끼를 해결해 가는 것도 새로운 역사였다. 제조창 정문 건너편의 대폿집의 유혹도 악착같이 살라는 말과 새 역사 창조라는 구호로 이겨낼 수 있었다.

신영주의 논에 흙을 붓고 들어서기 시작한 것들은 단층 주택이었다. 처음엔 나무집에 지어지더니, 차츰 슬래브 지붕의 집들도 들어섰다. 지금의 집터를 산 것이 슬래브 집들이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그해는 의원님이 새로 국회의원이 되던 1978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선택이었다. 영주군이 영주시가 되면서 시청이 신영주에 지어진다는 소문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땅값이 급등하기 전의 싼 가격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뒤이어 들려온 의원님의 정치 활동 규제라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참 무시무시한 정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리고 의원님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해 뒤, 의원님이 다시 정치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것도 야당이라고 했다. 그리고 의원님께서 영주에서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원님의 유세가 원당로에서 열린다고 했을 때 좀 의아했다. 하지만 유세장의 풍경을 보며 무소속도 야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도 건달 끼가 있는 젊은이들이 유세장을 휘젓고 있었다. 유세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거기서 예전의 비서를 볼 수가 있었다. 용케도 날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맞지요.”
“네, 비서님. 김 시국입니다.”
“아! 시국 씨. 좀 도와 줄 수 있나요?”

대뜸 도와 달라고 했다. 직접 나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과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였다.

오랜만에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아버님은 마을 회관에 사람들을 모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모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온다는 시간이 되었는데 의원님이 오지를 않았다. 마을 입구로 나갔다. 철둑 건널목 부근에 자동차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고가 났는가 싶어서 달려갔다. 그런데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비서님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마침 사촌 동생이 그자리에 있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말은 않고 나를 잡아끌며 자그만 소리로 말했다.

“형님은 이런 일이 있으면 저와 상의하셔야지요.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영주서 야당 국회의원이 말이 됩니까.”

그해 의원님은 고배를 마셨다. 그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었던 일도 그렇게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전 박용만 편에 있던 사람까지 의원님의 상대편에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대포 한잔하자고 했다. 친구는 자네가 웬일이냐며 반겼다.

집들이들 하려고 온 집안사람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지난 20년 동안 집 없는 설움을 억누르며 마련한 집이다. 1층은 가게이고 2층은 가정집으로 설계했다. 사람들은 이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말속엔 비아냥거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었던 사람이 가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착같이 살라는 의원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참 악착같이 살았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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