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실력자 왕실장인들이 만든 최고 걸작품 ‘흑석사 목불’
날씬한 비례미, 양감과 선의 미 등 세련되고 격조 높은 불상
​​​​​​​효령대군 등 왕실 시주와 서민대중 297인 시주로 만든 불상

부드럽고 우아한 양감과 선의 미
부드럽고 우아한 양감과 선의 미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초암사 상호스님이 1949년 소백산 소개령 때 업고 내려와 흑석사를 중건하고 봉안한 불상이다. 이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품은 1993년 11월 5일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됐다. 이 목불의 복장기(腹藏記)와 보권문(普勸文)에 의하면 1458년에 정암산(井巖山) 법천사(法泉寺)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확인됐다.

법천사는 강원도 원주 명봉산(鳴鳳山), 전남 무안군 승달산(僧達山) 등 여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권선문에 기록된 정암산 법천사는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이 목불 복장에서 나온 보권문과 복장기에 조성 당시 시대적 배경과 조성 목적, 경제적 어려움 등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캐면 캘수록 새로운 보물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 불상과 보권문 그리고 복장기에 숨겨진 보물들을 하나하나 살펴 그 가치를 조명해 보기로 한다.

아미타불 좌우후면상
아미타불 좌우후면상

아미타불 조성 목적

아미타불을 조성한 까닭은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아미타삼존 즉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 삼존을 조성함으로써 임금의 무병장수와 국가의 복과 만백성들의 근심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빌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불상이라는 것이다. 원래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 삼존을 조성하였는데 현재 흑석사에는 아미타불만 전한다.

뛰어난 손의 곡선미
뛰어난 손의 곡선미

우아 세련 깔끔 묘사한 불상

한국미술사연구소에 의하면 “흑석사 아미티불상은 세련되고 격조 높은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먼저 구도 비례미에서 신체가 늘씬하여 세장한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날씬한 비례미를 보여주는 불상이다. 이런 날씬한 비례미는 티베트계 명양식의 영향을 받은 조선 초기 불상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다음은 형태미다. 육계가 뾰족하고 정성에 둥근 계주가 놓여있는 점인데 정상 계주는 끝이 뾰족한 보주형이거나 둥근 구슬형이다. 이와 함께 전체 나발(부처의 머리털)은 성글고 큰 편이어서 왕룡사원 아미타불상이나 천주사 아미타불상과 동일하다.

얼굴은 계란형의 갸름한 편이고 뺨에는 다소의 양감이 있고, 은은한 미소까지 감돌아 귀족적인 고귀함이 돋보이고 있다. 당시 이름난 화원의 초상 실력에 의해 왕실 귀족의 고상한 인품을 잘 표현한 뛰어난 실력으로 고귀한 불상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양감과 선의 미를 살펴보면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갸름한 얼굴에 은근한 양감을 가미하여 온화하고 우아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부드럽고 우아한 양감은 얼굴이나 귀, 어깨나 무릎의 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옷 주름이나 손가락이 나타내고 있는 선은 우아하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하게 묘사되고 있어 불상이 한층 더 고상하게 보인다.

원문 8, 9면 일칙무본(日則務本)
원문 8, 9면 일칙무본(日則務本)

왕실의 비극적 상황

복장기에 기록된 조성연대 1458년은 세조 4년 10월인데 권선문의 작성은 그 전해인 세조 3년인 1457년 2월이어서 시주금을 받기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아미타삼존불이 완성된 셈이다.

이 1458년은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임금으로 등극한 지 4년째 되는 해인데 그 전 전해인 1456년에는 사육신이 처형되고 1457년에는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는 궁중 비극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왕실은 이런 비극적 상황에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과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복장기
복장기

아미타불삼존 보권문

보권문(普勸文)이란 시주동참을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문서이다. 백지묵서로 발견된 보권문은 다음과 같다.

서방의 교주인 아미타불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특별히 구원할 인연이 있으므로 이 아미타부처님을 한 번 부르면(稱念) 극락세계의 구품연대(九品蓮臺) 위로 인도하여 맞아주시며, 관음보살은 괴로움을 제도해 주시라는 소리를 듣고 중생을 괴로움 속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주시는 분이며, 지장보살은 명부세계에 상주하면서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니 이 삼존의 위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빈도(貧道)는 존상을 조성하고자 하오나 힘이 미약하여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우므로 널리 지위고하의 모든분들께 고하오니 부디 한 분도 빠짐없이 뛰어나고(殊勝) 좋은 인연을 맺어주시면 참으로 다행스럽겠습니다. 이 수승한 인연으로 군왕께서는 수명장수하고 나라는 복되고 만백성들은 모든 근심이 사라지기를 삼가비옵니다.

천순원년(天順元年) 2월일지 간선도인(幹善道人) 거목 공양 보시 채색 칠
의빈궁권씨 명빈궁김씨 유인신씨 효령대군 대시주 이우 대시주 지용천 대화주 성철

위 보권문은 ‘井巖山 法泉寺堂主彌陀三尊願成諸緣普勸文’이라는 제목 아래 권선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보권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흑석사에 소장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원래 정암산 법천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천순원년(세조3, 1457) 2월에 정암산 법천사에 봉안하기 위한 아미타삼존상을 만들기 위해 의빈궁 권씨, 명빈궁 김씨, 효령대군 등 왕실 구성원들이 주도하여 불상 조성에 필요한 권선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복장기
복장기

1458년 10월 조성 복장기

두루마리 형식의 복장기(服藏記)는 옅은 청색으로 물들인 명주와 그 뒤로 연이어 붙인 한지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 조성의 발원과 조성과정에 참여한 인물 명단을 187행에 걸쳐 자세히 기록하였다. 발원문과 종친, 비빈, 조성에 참여한 화원, 서민, 기타 297인 등 대규모 시주질을 차례대로 필사해 놓았다. 아래는 번역한 복장기이다.

무릇 아미타불은 모든 부처의 본산이고, 관세음보살은 모든 보살의 본산이며 지장보살은 고해 중생의 본산이니 이에 아미타삼존은 다른 부처님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삼가 초상을 조성하오니 세세생생 영원히 삼악도에서 벗어나길 기원하고 봉축하나이다.

주상전하 수만세, 왕비전하 수제년 세자저하 수천추 제군중실 각안녕 전쟁이 영원히 그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은 평안하며 불교는 날로 더 빛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성하기를 기원하나이다.

다음은 시주기(施主記)이다.

의빈궁 권씨, 명빈궁 김씨, 효령대군, 광덕대부연창위, 유인 신씨, 대시주 전 사직 지용천 양주 이씨 소세, 대시주 이화 양주(이하 생략 23인), 화원 사직 이중선 이흥손, 부금 한신, 금박 이송산, 칠금 우동막동, 각수 황소봉, 마조 김공동, 소목 양일봉, 대화주 성철(性哲), 동원화주 성수, 극인, 혜총, 정의 성총, 승희, 의정, 선우, 성원, 석파회, 석공회 등(이하 248인의 시주질 생략)

복장기 외에 별도로 연창위와 정의공주 시주명과 시주질 25인 명단도 별도로 있는데 특히 정의공주와 연창위의 시주명이 별도로 있다는 것은 이 불상 조성에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어서 크게 주목된다. 각수 황소봉은 아미타불을 조각한 장인이다. 이른바 불상 조성의 실제적인 조각장이므로 불상 조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 걸작품 탄생

보권문과 복장기 제일 앞부분에 조성연대가 적혀 있다. 불상의 비용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을 쓴 것은 1457년(세조3년) 2월이고, 불상을 조성한 날짜는 세조4년 1458년 10월 이어서 시주를 거두기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아미타삼존불이 완성된 것이다. 시주도 빨리 거두었고 불상도 빨리 조성되었다. 이 불상은 당대 최고 실력자들인 왕실 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였기 때문에 최고의 걸작품이 탄생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왕실 시주자들

아미타불 불사 시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왕실의 의빈궁 권씨, 명빈궁 김씨, 효령대군, 연창위 안맹담 등이 이 불상 조성에 적극 참여한 이중선, 이흥손 등 장인(匠人) 8명 모두 국가 장인이므로 명실공히 왕실 발원 불사라 할 수 있다.

의빈궁 권씨는 태종의 후궁으로 태종 승하 후 비구니가 되어 수행과 불사에 진력한 분이고 명빈궁 김씨 역시 태종의 후궁으로 많은 불사의 후원자가 된 분이다. 효령대군은 세종의 형으로 불교 중흥에 왕실을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활약한 분이며,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부마 연창위 안맹담은 불사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서민 대중의 시주

왕실 외 시주자는 대시주 전 사직 지용천 외 272명과 별도의 시주질 25명의 명단이 있어서 297인이 모두 서민들이다. 이름으로 보아 승려들은 여러분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서민대중인데 이들의 십시일반으로 완성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흑석사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에 대해 알아봤다. 지금 대구박물관에 위탁 관리하고 있는 복장유물이 본래의 자리(흑석사)로 돌아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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