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뜻으로 나라 사랑을 한 부자(父子) 목사(牧師)

백남(白南) 강병주(姜炳周)[1882~1955]

강병주 목사
강병주 목사

평은면 천본리 내매마을에서 강기원(姜祺元)과 이성곡(李星谷) 사이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10년 기독교 재단인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사범과를 졸업한 후, 고향 마을에 기독내명학교를 설립하여, 향토 계몽운동과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사회 계몽가와 종교지도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풍기로 와서 지금의 성내교회인 풍기교회를 맡아 10년 동안 선교와 사회 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이후 경안노회장(慶安老會長)을 두 차례나 역임했고, 1935년 중앙총회 종교교육부 교사양성과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동흥중학교를 창설하였다. 6·25전쟁 후 동흥중학교를 인창재단에 넘겼는데, 동흥중학교가 지금의 송암여자고등학교이다.

강병주 목사 가족사진. 뒷줄-교복을 입은 이가 강신명, 신정형제. 훗날 목사가 된다
강병주 목사 가족사진. 뒷줄-교복을 입은 이가 강신명, 신정형제. 훗날 목사가 된다

1931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직후에는 체신부 장관의 요청으로 각 지방을 순회하며 전국 체신부 산하 공무원의 한글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글 교본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500문답 해설』을 편찬하였지만, 6·25전쟁으로 출간되지는 못하였다. 저술로는 『한글맞춤법 통일안 500문답 해설』, 『십사석수확법』, 『면화다수확법』, 『신선동화집』, 『동화작법』 등이 있다.

아들 신명은 내명학교(乃明學校)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 공주 영명학교, 서울 배재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평양 숭실전문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서문교회, 선천남교회의 전도사를 역임하였다. 1938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후 선천남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47년엔 영락교회 목사로 취임하였고, 1955년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새문안교회 목사가 되어 25년을 봉직했다. 이밖에도 숭실대학교 재단이사장,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대한기독교협회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장,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기독교와 교육

한글교육을 위한 신전동화법(1954년)
한글교육을 위한 신전동화법(1954년)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가 허락될 때,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은 학교와 병원만 운영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서울의 ‘광혜원(세브란스병원)-연희전문(연세대학교)-새문안교회’와 대구의 ‘동산병원-계성학교-대구제일교회’가 좋은 예이다. 영주에도 이산의 내매교회와1910년 세운 ‘기독내명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강석진이 1910년 4월 5일 시작하는데, 1913년 7월 14일 조선총독부 「학제 1542호」에 근거해 사립 기독 내매학교로 인가를 받아 1913년 9월 1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일제강점기 영주시에 설립된 유일한 기독교계 사립학교이자 경상북도 사립학교 중 처음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학교이다.

유적지

내매교회와 내명학교
·평은면 내성천로 396

옛 교회는 영주댐 건설로 허물고 언덕 위로 이전하여 새로 예쁘게 양옥으로 지은 내매교회와 옮겨 세운 내명학교 한옥 건물과 교적비가 있다. 내명학교는 영주 지역 민족교육뿐만 아니라 사회·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대표적 교육기관이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 20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한국기독교 사적 제11호로 지정했다.

※ 참고자료 『소죽 강신면 목사의 생애와 사상』영주문화원,『내매교회 100년사』내매교회

내매마을 전경
내매마을 전경
신축한 내매교회와 이건한 내명학교
신축한 내매교회와 이건한 내명학교

 

[미니픽션] 한글로 복음을 전하며, 우리 글을 지킨 ‘한글 목사’

내명교가 완공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락교회를 은퇴하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 시작했던 일이었다. 이제 양지내매와 음지내매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고 기뻐했다.

내매의 ‘내(乃)’자는 내성천(乃城川)에서 따온 말이고, ‘매(梅)’는 매화낙지(梅花落地)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마을 어른들은 내성천이 흐르는 이런 좋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니 잘 될 것이란 말을 수 없이 들은 것 같다. 이런 풍수지리를 잘 인정하지는 않지만 펑화로운 풍경을 벗 삼아 살아온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마을과 건넛마을 사이에 흐르는 내성천은 늘 머나먼 동네로 만들어 주곤 했다.

비가 와서 물이 조금이라도 불으면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동네였다. 평생 염원이 이제 되었다고 야단이었다. 내명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배를 타고 물길을 건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숭실학교가 있는 평양에 갈 때, 수많은 다리를 건너며 우리 마을에도 다리가 있었으면 했었다.

내가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까지 온 것은 아버님의 뜻이었다. 없는 살림에 이역만리에 유학을 시키는 것은 기독교 교육을 제대로 받으라는 의미였다. 기독 내명학교를 나와 숭실학교에 왔지만, 향수병과 열병으로 견뎌내지 못하고 휴학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두드린 것이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공주의 영명학교로 전학했다가 다시 배재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옮긴 곳이 대구 계성중학교였다. 아버지가 이사로 있던 북장로교이어서 그랬을까 하고 짐작하면서, 이렇게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학교를 통해 기독교의 정의와 도덕의 함양, 합리성의 중시, 세계화된 근대 시민의식의 습득이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 무렵 아버지는 풍기교회(성내교회)에 담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아버지를 그 지역 경제 살리기 운동을 열심히 하신다고 했다. 경안농원을 운영하며 농민들에게 필요한 농사안내서를 직접 발간했다. 농촌계몽과 농사 개량에 관해 서술한 책이었다.

1권에서는 쌀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농사업에 관해서, 2권에서는 채소 농사에 관해서 기술하였는데, 채소 농사는 적은 면적의 농토에서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큰 힘을 쓸 필요가 없는 농사이므로 여성들도 쉽게 손댈 수 있다는 이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한글로 편찬하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한글운동은 이때부터였을 것 같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전파되며, 한글이 전파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파된다.’라는 것이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인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에 있던 서민 대중이 새로운 진리인 기독교의 성경을 접하므로 심령의 구원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한글을 깨치어 처음으로 글눈을 뜨고서 지식과 개화의 거듭난 기쁨을 동시에 체험하니 이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의 뜻이 실현된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전파는 한글로 소통하며 개막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80년대 만주에서 시작된 존 로스의 ‘예수성교전서’나 이수정의 ‘현토 신약성경’이 다 한글을 만들어졌다. 한국 기독교의 첫 사업인 성경 보급이 한글 운동으로 새 시대를 열게 된 셈이었다. 그 뒤에 한자를 섞어 쓴 이른바 국한문 성경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이는 일부 한자 지식인의 요구를 수용한 것일 뿐 전체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글은 성경과 찬송가뿐만 아니라, 쪽 복음과 전도지 등에도 기독교의 복음전파에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고, 김준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소설 ‘천로역정’ 등 기독교 문학의 번역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예수교 회보’ 등 신문과 ‘신학 월보’, ‘신생’ 등 잡지를 내며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확장되었다.

그리고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면서,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불편이 없고, 소통도 잘 되며,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과 대중에게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한글의 보급을 위해 말본, 사전 등의 연구와 출판에 더 주력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선교사 달래의 ‘조선교회사’와 파리 외방 선교회가 출판한 ‘한불자전’ 그리고 존 로스의 ‘조선어 첫걸음’은 한글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한글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만들어진 언더우드의 ‘한영문법’과 ‘한어 자전’은 한글 체계화의 기초가 되었고, 게일 선교사의 ‘한영자전’도 한글 전파의 일익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서 모든 일은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정책은 계속 바뀌었다. ‘조선어’를 필수로 ‘일본어’를 병용토록 했던 지침이, 한순간에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우리 국어가 ‘조선어’가 되어 일본어만 상용토록 하였다. 그리고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는 창씨 개명까지 강압하여 거리와 집안에서도 우리말, 우리글이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그 참담한 상황에서도 오직 교회에서만 성경이 한글로 적히고, 목사의 설교가 우리말로 선포되고, 찬송가의 가락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파되었다. 학교에서도 우리의 말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실정이었지만, 주일날 예배당에서는 예배 전 한글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고, 또한 예배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영혼의 해방과 민족혼의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의 한글 운동은 또 다른 애국 운동이었다. 이런 한글 사랑과 연구를 통한 진흥, 출판은 민족정신을 지키고 독립 의지를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글 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만이 아니라 그 밖에도 오산학교 한뫼 이윤재, 정동교회 김윤경, 새문안교회 최현배, 정태진, 정인승, 장지영 같은 한글 학자 등은 다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였거나 기독교 학교에 봉직하며 이를 연구하였고, 이를 사랑하고 이를 지키고 선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최현배 선생은 ‘한글 통일안 맞춤법 해설 500 문답집’ 서문에서 “우리나라에서 한글 보급에 두 사람의 공로자가 있으니 곧 강병주 선생과 이윤기 선생이라” 했다. 그래서 이윤재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글 보급 운동에 최대의 열정을 기울였기에 “한글장로”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항상 한글 운동을 전도와 함께하였기에 “한글 목사”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무렵 난 나름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 찬송가 짓기였다. 신앙생활을 위하여 반드시 성경과 찬송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은총을 감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래를 모아 “아동 가요곡선 300곡”을 엮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 일이 나의 목회 활동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 풍기교회 유년 주일학교는 주일마다 이 교가를 불렀다.

기쁘다 우리의 동무들아 우당창 노래가 들린다
모여라 이 넓은 예배당에 풍기 유년 주일학교 만만~세
진리의 빛이 가득히 차매 우리의 인격을 길러보세
이 땅에 자라는 내 동무들아 서로서로 사랑하며 자라~세

아버지는 6.25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버지의 삶은 하나님과 한글이 하나였지 않았을까? 한글을 통해 신앙을 배웠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신앙을 가르쳐 준 나랏말쌈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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