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

캔버스를 들고있는 작가(1934년)
캔버스를 들고있는 작가(1934년)

목부(牧夫) 권진호(權鎭浩) 1915~1951

영주 최초의 근대미술인 권진호는 1915년 6월, 부석면 임곡리에서 아버지 권창동(權昌東)과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부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대구농림학교’에 진학했는데, 특히 미술부 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반 때인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계림의 초춘”이 입선되면서 아예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당시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직업이 교사라고 여기고, 졸업 후 ‘대구사범’에 입학해 6개월 단기 교원자격을 획득하고 ‘부석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받게 된다.

훈도증서
훈도증서

교직 생활 중에도 유화로 네 번이나 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해방 이후 권진호는 초임교장으로 ‘창락초등학교’에 발령받았는데,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옥대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동란이 발발하자 가솔들을 이끌고 친척이 사는 대구 동인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그해 가을 단산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1951년 3월 21일, 36세의 나이로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유족은 급성 장티브스를 사인으로 추정하며, ‘차라리 대구에 남아있었더라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소회를 내비쳤다.

대구농림학교 졸업증서
대구농림학교 졸업증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일제강점기의 미술 공모전이다. 약칭 선전(鮮展), 조선미전(朝鮮美展)으로도 불렸다. 3·1 운동 이후 펼쳐진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번 개최된 전람회는 매년 공모전 형식으로 열렸는데,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미술계 신인 등용의 유일한 창구였다.

졸업을 앞둔 작가가 화필을 잡고있는 모습(1935녀 3월)
졸업을 앞둔 작가가 화필을 잡고있는 모습(1935녀 3월)

조선미술전람회는 동양화와 서양화, 조각 부문 외에 조선 미술의 특성을 살려 서예 부문이 추가되었다. 심사위원에는 조선인도 위촉되었으나 중반 이후로 갈수록 일본인의 비중이 더욱 늘어났다. 많은 미술가를 배출하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관(官)에서 주도하는 형식으로 인해 미술계에 권위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순흥심상소학교 교사 시절(좌측 첫번째, 1939년)
순흥심상소학교 교사 시절(좌측 첫번째, 1939년)
순흥심상소학교(1939년)
순흥심상소학교(1939년)

유적지 및 전시 안내

권진호화백 유작 초대전

▶ 전시기간: 2022년 11월 22일~12월 3일

▶ 전시장소: 영주148아트스퀘어

▶ 전시내용:
•권진호 화백 유작전: 유화 4점, 수채 화 14점, 병풍1점
•아카이브 자료전: 서류 6점, 대구농림학교 졸업 앨범, 순흥공립심상소 학교졸업 사진첩
•3부자전: 권오규(둘째 아들/영주중 6회 졸업), 권오준(셋째 아들/영주중 10회 졸업)
•오마주전: 김종한(전 영주여고 교장), 김종길(전 봉화교육장)

※ 초대작가 2인은 모두 권진호처럼 평생 교직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린 분이다. 그래서 화가의 못다 핀 후반부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았다.

▶세미나: 11월 26일(토) 오후2시 / 148아트스퀘어 공연장

▶발제자: 김영동(미술평론가), 송재진(즈음미술관장)
 

을유신춘 진호시필(乙酉新春 鎭浩試筆), 8폭병풍, 1943
을유신춘 진호시필(乙酉新春 鎭浩試筆), 8폭병풍, 1943

[미니픽션] 90년 만의 외출, 혼(混)과 색(色)의 만남

“권진호라는 화가와 만나게 된 것은 『대구미술100년전』 도록을 통해서였다. 책장을 넘기다가 생소하기만 했던 작가의 프로필에 출신지 ‘영주’라는 단어가 눈길을 확 잡아당겼다. 생각지도 못했던, 근대기 영주 출신 작가 한 분과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당시 영주현대미술50년사를 전시용 도록이나 경북예총지 등에 약사(略史)로 발표하며 지역 미술사 정리에 매진하던 터라 새로운 광맥을 발견한 듯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거리풍경' 종이에 수채, 47*57cm, 1930(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거리풍경' 종이에 수채, 47*57cm, 1930(대구문화예술회관 소장)

이후 틈틈이 권진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안동사범> 11회 동기회 인터넷카페를 발견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셨던 권오규 선생의 부친이었다는 사실도 확인케 되었다. 카페엔 선생이 그린 수채화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부친 또한 화가였다며 부전자전을 예찬하는 기사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이후 선생과 만남이 이어졌고, 권진호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송재진은 “권진호 유작전 기획의 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종이에 수채, 52*17cm, 1933(대구미술관 소장)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종이에 수채, 52*17cm, 1933(대구미술관 소장)

그 후 송재진은 권진호 유작 기증전을 기획하여 동분서주한다. 시와 협의하였지만, 작품을 받을 준비가 안 된 지역 여건-미술관이나 전문 수장고도 없는 상황으로 흐지부지되고 만다. 특히 유화작품들은 박락(剝落) 현상이 심화된 상태라 이를 수복할 수 있는 기관 또한 전문 미술관이 되어야만 마땅했다.

비록 기증은 바랄 수 없게 되었지만, 이번에 선친의 유작전이나마 고향에서 열고 싶어 한 유족의 바람을 수용하게 된 일은 그나마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송재진은 영주시와 영주문화관광재단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며 안도의 숨을 이제 쉰다.

'소녀' Oil on canvas, 113*87cm, 1942(국립미술관 소장)
'소녀' Oil on canvas, 113*87cm, 1942(국립미술관 소장)

권진호는 1915년 부석면 숲실에서 태어나 대구농림학교 다니던 5년을 제외하고는 영주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1936년 교직 생활도 부석에서 시작을 한다. 그가 교직 생활을 선택한 것은 작가가 19살이었던 1934년 제13회 조선미전에 “계림의 초춘”이란 수채화가 입상을 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짐작을 할 수 있다.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농업 분야의 관리자 생활보다는 교육자의 길이 그림을 그리는 일에 더 정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있어서일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그의 작품세계를 초기 수채화의 시기(1932~1937), 인물문화 주제의 유화 탐구 시기(1938~1945), 새로운 현대적 수묵화의 시도(1946~1949)로 나눈다,

'양장의 소녀' Oil on canvas, 90*72cm, 연도미상
'양장의 소녀' Oil on canvas, 90*72cm, 연도미상

그리고 이번에 보여주는 권진호의 수채화들은 1933년이거나 대개 이 무렵 제작된 것이 많다. 대구농림학교의 교내에서 미술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1933년에서 1937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여러 폭의 풍경화들로 인해 제작 시기별 발전상을 추적해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동은 수채화 장르에 주력하던 권진호의 작품세계에 큰 변화를 일으킨 계기는 유화로 매체를 전환하면서부터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유화의 특징에서 주제적 인물들의 성격은 조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의지가 두드러진다고 했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의 노인이나 한복 입은 여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무렵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전이나 각종 전람회에는 ‘총후단결’이니 ‘결전의지’이니 하는 구호가 빗발치고 모든 미술 활동을 엄격히 통제하에 두던 시절이다. 그러나 권진호의 그림 어디에도 그런 군국주의에 강요되어 혹은 자진하여 부응하는 주제나 색채는 없다.

'엿장수' 화판위의 첨, 유채, 95*128cm, 1944
'엿장수' 화판위의 첨, 유채, 95*128cm, 1944

또 그는 전통 서화에 관심을 가져 자필 병풍을 남겼는데 일찍이 수채화로 연마된 달필의 기량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수준의 작품이다. 여덟 폭으로 꾸며져 있는 그 속에는 춘란, 화류, 만국, 월매 등 전통적인 화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해 넣은 그림도 운치가 있는 데다 희망이나 평화와 같은 시대에 맞는 현실적 메시지를 주제에 포함해 더욱 의미 있게 독창적 장르의 탄생을 예고했다.

하지만 그는 36살의 나이로 요절을 하였다. 그것도 6.25 전란 중, 약 한 번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옥대초등학교 교장 사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자료정리 김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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