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발견한 복장유물, 국보 지정됐지만 29년째 타향살이
1458년 정암산 법천사서 조성한 불상, 초암사로 온 내력 깜깜

1949년 소개령 때 상호스님이 초암사서 불상을 업고 흑석사로
​​​​​​​1992년 도둑이 복장유물 발견,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

상호스님이 아미타불을 모셨던 초암사(1912년)
상호스님이 아미타불을 모셨던 초암사(1912년)

영주에는 경주 다음으로 국보가 많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17), 무량수전(국보18), 조사당(국보19), 소조여래좌상(국보45), 조사당벽화(국보46) 등 부석사에만 5점이 있고, 소수서원에 안향영정(국보111) 1점이 있어 모두 6점이 있었는데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이하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일괄(국보282) 국보로 지정되어 영주에 국보가 7점이 됐다.

국보가 1점도 없는 시군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데 비하면 영주는 ‘찬란한 문화의 보고’란 말이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 흑석사 아미타불은 원래 흑석사에 있던 불상이 아니다. 흑석사를 중창(重創)한 상호스님이 6.25 전(1949) 초암사에서 업고 온 불상으로 정암산 법천사에서 왕실 주도로 조성된 불상이라고 확인됐다.

이 불상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흑석사에 도둑이 들어 복장유물을 꺼내 놓는 바람에 불상과 복장유물이 일괄 국보로 지정(1993.11.5)됐기 때문이다. 그 후 문화재청과 여러 학자들이 불상과 복장유물에 대해 계속 연구가 이어지고 있고, 논문도 여러 편 나왔다고 하니 그 속에 숨겨진 보물이 많긴 많은 모양이다.

상호스님 영정
상호스님 영정

상호스님이 업고 다닌 불상?

상호스님이 언제 이 불상을 만나 절을 옮길 때마다 업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6.25 전 1949년 가을 소백산에 소개령이 내려졌을 때 이 불상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상호스님은 초암사에서 이 불상을 업고 영주로 내려와 흑석사를 중창한 사실은 확인됐다.

그 당시 상호스님이 불상을 업고 초암사를 떠나자 순흥 사람들은 초암사 중이 불상을 업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최근 들어 그 불상이 국보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호스님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있다.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불상이 초암사로 옮겨 온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상호스님의 행장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복장유물-묘법연화경
복장유물-묘법연화경

아미타불을 연구하고 있는 A교수는 “아미타불을 조성한 법천사는 원주 법천사와 정선 법천사가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 있다”고 했고, B교수는 “불상 조성을 주도한 왕실의 의빈 권씨가 금성대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 순흥 인근 초암사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 상호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신도회 임원을 지낸 분(영주 보름골)의 후손은 “상호스님이 묘향산 큰 절에 있을 당시 절 창고에서 이 불상을 만나 귀한 불상임을 알고 가는 곳마다 업고 다니다가 초암사 주지로 부임(1945)하면서 초암사에 봉안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흑석사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흑석사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흑석사에 도둑이 들어?…

1992년 흑석사에 도둑이 들었다. 부봉(당시 주지) 스님이 새벽 예불을 드리려 극락전에 가보니 불상이 없어졌다. “큰일났다. 상호 큰스님께서 팔십 여리 산길을 직접 업고 온 불상인데…” 즉시 경찰서와 시청에 이 사실을 알리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 오후 절 인근에서 불상과 복장유물이 발견돼 모두 수습됐다.

이 불상을 업고 다닌 상호스님은 입적할 때까지 복장유물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후임 주지 기연스님과 다음 주지 부봉스님 또한 불상의 내부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복장유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데 도둑이 복장유물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후 문화재청과 학자들의 연구와 고증과정을 거쳐 불상과 복장유물은 1993년 국보 제282호로 일괄 지정됐고, 연구가 계속되어 2022년 복장유물 도난 사건으로 제외됐던 ‘감지은니 묘법연화경’과 ‘백지금니 묘법연화경-변상도’ 등 2점이 추가로 국보에 포함돼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불(가운데)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불(가운데)

국보 지정 후 숨은 이야기

상호스님이 주지로 있을 당시 흑석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공경하고, 의탁했다고 한다. 4월 초팔일 부처님 오신 날은 형편에 따라 쌀 보따리를 이고 지고 절(흑석사)로 가서 부처님께 시주하고 소원을 빌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빌던 그 부처님이 바로 국보가 된 아미타불이다.

마을 사람들이 전한 아미타불 관련 뒷이야기들을 모아봤다.

국보급 유물들을 보관할 시설이 없던 흑석사는 1996년 복장유물을 여행용 가방에 담아 인근 이산파출소 무기고에 1년여 동안 보관하는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어느 일간신문에 이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도둑이 부처를 훔쳐 달아났는데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과 스님이 합세해 도둑과 격투 끝에 되찾아 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도난 사건이 잦자 스님은 신도회장에게 유물 일부를 맡겼더니 밀매업자에게 8천만 원에 팔아넘겼는데 이 밀매업자가 더 비싼 값에 되팔려다 발각돼 모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후 신도회도 자취를 감추고 마을 사람들은 절을 멀리하게 됐다고 말한다.

세월이 흘렀지만, 복장유물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도난 사건으로 국보 지정에 누락됐던 복장물 2점이 2022년 추가로 국보에 포함됐다.

국보 목조아미타불 좌상(282호)
국보 목조아미타불 좌상(282호)

불상과 복장유물 지금 어디?

흑석사 아미타불은 극락전 내 유리박스처럼 생긴 ‘특수유리방화금고’ 속에 모셔져 있다. 최첨단 방탄유리와 3중 시건장치로 무장한 ‘특수키 보안장치’라고 한다.

불상 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관리상의 문제로 2000년 온양민속박물관에 위탁 관리토록 했다. 그러다가 온양민속박물관의 경영상 문제가 생기면서 복장유물은 2002년 3월 국립대구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진 뒤 현재까지 이곳에서 보관 중이다.

29년째 타향살이하고 있는 셈이다. 대구박물관 수장고(收藏庫)에 있는 유물들은 박물관 전시회 등 행사가 있을 때 다른 전시품들과 함께 1년에 한두 차례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흑석사에 성보박물관을 지어 타향살이하는 유물을 찾아와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불씨를 살리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발 벗고 나설 주체가 미약한 탓일까?

금성대군을 추모하는 불상?

부석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선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고, 흑석사 아미타불 복장유물에 세상이 떠들썩한 것은 금성대군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세종의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세조(1417~1468)는 억불숭유 정책 속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지만, 부처의 자비와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다. 조선 초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 이유(李瑜, 1426~1457)와 깊은 관련이 있는 불상이 바로 세조 4년(1458년)에 조성된 국보 제282호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이다.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은 세종의 여섯째 왕자이며,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 영주사람들은 더욱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순흥은 금성대군을 신으로 모시고 있고, 순흥에 금성단이 있기 때문이다.

단종은 1455년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1456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후 1457년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됐다. 같은 해 9월 금성대군은 유배지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10월에 처형됐다.

단종과 함께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1395~1446)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1468)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형인 문종의 부탁으로 조카인 단종을 지키려다 1456년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해 1457년 10월 처형당했다.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1457년 10월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금성대군과 이보흠 순흥부사 그리고 수많은 순흥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1458년 10월 완성됐다. 이때는 단종과 금성대군의 1주기가 되는 해이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은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 복위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불상임이 밝혀지고 있어 더 신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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