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각자의 길과 가르침의 길

청강(靑江) 김영하(金永河), 1919~2015

1919년 3월 3일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순흥보통학교(순흥초등학교)와 중동학교(중동중고등학교)를 나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를 다니면서, 항일학생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함흥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마자, 풍기중학원(풍기중학교)에서부터 40년 교직자의 길(영주 근무 29년)을 걷는다.

퇴직 후에도 퇴직교사들의 모임인 ‘영주교문회(榮州敎文會)’를 조직하여 교육자들의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하였고, ‘영주향토사연구회’를 만들어 영주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 보존하였으며, 태백산과 소백산에 인접한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북도의 9개 시군의 향토사학자들의 모임인 ‘태소백권고문화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독립운동가, 향토사학자, 교육자로 얘기한다.

2015년 5월, 96세의 일기로 영면(永眠)하였다. 해방 후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추가 졸업장을 받았으며,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동상 앞에서(연희 전문학교 시절)
언더우드 아펜젤러 동상 앞에서(연희 전문학교 시절)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

1939년 12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민족 독립에 뜻을 품고, 동교생 김상흠·서영원·김재황·이동원·민영로와 함께 경성 사직동에 있는 윤주연의 집에서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였다. 3.1운동과 같은 방식의 운동을 거행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면서, 조직의 전국적 확대를 도모하고, 동경 유학생과도 참여시키는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때 김영하는 조선학생동지회의 경상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동지 규합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41년 7월, 하부 조직인 원산상업학교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김영하는 1941년 9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태소백권고문화연구회 결성(1993년)
태소백권고문화연구회 결성(1993년)

향토사 연구 활동

1984년 영주여자고등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영주향토사연구회(榮州鄕土史硏究會)’를 만든다. 영주에 잔존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찾아내고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태백산과 소백산에 인접한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북도의 9개 시(市)와 군(郡)이 모인 ‘태소백권고문화연구회(太小白圈古文化硏究會)’를 조직한다. 1994년 8월 영주시청 강당에서 향토사논문발표대회를 개회하며 대회의 의미를 이렇게 밝힌다.

“오늘 물신주의에 이끌리어 우리 선조들이 아끼며 가꿔온 문화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표적없는 문화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이 맹목적인 문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정신을 혼돈과 파면으로 몰고 가는 비윤리적인 결과만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 빼어난 문화를 흔들림없이 바로 세우고, 어떻게 새로운 문화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국립현중원에 안장
국립현중원에 안장


[미니픽션] 세상 안으로 걷기

“내일 시간이 있는가?”
김영하 선생님이셨다. ‘순흥 큰줄당기기’ 준비하는 걸 한번 돌아보자고 하신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직을 위해 학교에 인사를 하러 가던 날이었다. 아직 여름방학이 끝나지 않은 날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행정실에 들렀더니, 교장 선생님이 자리에 계신다며 안내를 했다. 후줄근한 남방을 입은 노인네가 뿔테 안경 너머로 한참 보더니 대뜸 “결혼은 언제 할 겁니까?”하고 물었다.

여자고등학교에 총각 선생이 달갑지 않다는 속내가 말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새로 맞추어 입은 양복도 더운데, 그 첫 질문이 더 더웠다. 그리고 그 교장 선생님은 방학이 끝나자 말자 퇴임을 하셨다.

나는 결혼을 서둘렀다. 그 교장 선생님의 영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를 넘기고 다음 해 봄에 결혼식을 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주례를 옛 은사님께 부탁하셨다며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하셨다. 해방되고 영주에 처음 세워진 중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라고 하셨다.

기독병원의 길 건너편에 있는 다방에 들어서는데, 그 교장 선생님께서 계셨다. 주례하시면서 특별한 인연을 말씀하셨다. 혼주는 제자이고 주인공인 신랑을 동료라고.

새해가 되면 선생님께 세배하러 갔다. 처음엔 내외가 함께 찾았지만, 두 해 뒤부터 혼자 찾아뵈었다. 그 해였다. 거북선 그림을 보여 주셨다. 붓으로 그린 것 같았는데, 어디서 복사를 한 것이었다.

“이 그림을 누가 그린 줄 알아? 이순신보다 훨씬 이전에 그린 거야. 이덕홍이란 분인데, 이분이 영주사람이란 걸 김 선생은 알아?”

처음엔 그냥 깨우쳐 주시는 거로 알았다. 예전에 같이 근무를 했던 동료들도 인사를 드리러 가면 ‘무슨 책을 읽어 봤냐?’ ‘어디에 가 보았냐?’면서 지역에 대한 관심을 두게 하신다고 했다. “공부 좀 하라는 것인 줄은 알겠는데, 어디 그런 걸 살필 능력이 되나? 김 선생이 좀 거들어 주지?”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정도전 알지?” 하셨다. 그리고 “어디 사람인 줄 아는가?”라며 물으셨다. 머뭇거리자 “영주사람이야.”라고 하셨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이 대단하신 분이 영주사람이란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한 보름쯤 지났을 때 학교로 집에 한 번 들리라는 전화를 하셨다.

선생님은 편지지 몇 장과 복사한 족보 한 장을 주셨다. 그 족보엔 ‘정도전이 다섯 살에 성밑 마을에 있는 이모 집에 와서 살았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지에 메모한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글을 한 번 만들어 볼 수 있겠냐고 하셨다. 그때 스치는 말이 “김 선생이 좀 거들어 주지?”였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서 ‘어디 발표를 하시려는가?’ 하며, 그 편지지와 복사지를 들고 나왔다.

정리는 쉽지가 않았다. 어떤 내용이라 확인을 해야 정리를 할 수 있을 터인데, 어느 하나도 확인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 선생 차가 있나?”라면서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들른 곳이 정도전이 살았던 옛 집터와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정도전 아버지인 정운경의 묘소였다. 그날 한성골도 갔었고, 안정 대룡산에도 갔었다. 모두가 정도전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였다.

A4용지 여섯 장 정도의 글을 숙제를 시작한 지 거의 반년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원고를 드리고 보름이 지났을 때,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주셨다. ‘학술 발표 논문집’이었다. 그런데 집필자의 이름이 나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선생님, 이름이….”
“그래! 김 선생이 한 거잖아. 그런데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이 있나?”

선생님과 순흥 배점엘 갔다. 배점이란 지명이 배순이란 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배순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벌써 배점이었다. 배순정려비와 대장간 터를 돌아보고, 배점교회를 지나, 마을 뒤 골짜기를 들어섰다. 산비탈을 따라 밭두렁을 오르내리며 말이 없으셨다. 한 참 가다 보면 또 좀 전에 지난 곳이었다.

“분명히 이 부근인데, 무슨 흔적이라도 있을 터인데….”

배순의 묘소를 찾고 계신 것이었다. 몇 번 지나치다가 ‘여기가 맞다.’ 산비탈에 묻혀있는 비석의 흔적을 찾았을 때는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점심은 순흥 읍내리에서 자장면으로 때웠다. 4시였다. 나오면서 얼른 자장면값을 지급했다가 야단을 맞았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점심값까지 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8월이 되면 선생님은 분주하기도 했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광복을 맞이하실 때를 물어보았다.

해방 직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해 9월 5일, 해방된 조국이 나갈 바를 대중에게 계몽하기 위해 풍기국민학교에 면민을 모아 대중집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때 조직한 것이 풍기계몽회였다. 이 모임은 회원들의 힘으로 풍기중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한글 교육, 세계 지리교육 등 밤낮없이 가르친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1946년 5월 1일, 미군정청은 무허가 학교라는 명목으로 폐쇄를 지시하면서 영주농업중학교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정치하라는 얘기도 있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교육이 구국(救國)’이라는 것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교육은 참 중요해. 그런데 아직 제자리를 잡지를 못한 것 같아. 민주주의가 질서로부터 시작되듯이 교육계도 질서를 확보해야 해. 교사, 학생, 학부모 등 교육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요소들 사이에 질서가 절실히 필요하지.”

“그때 만난 제자들은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최현우(전 경북전문대학장), 김수진(전 서울대 교수), 김창근(전 국회의원), 금진호(전 국회의원)…. 많지. 벌써 먼저 간 사람도 있고. 그런데 당시 학생들도 좌우익으로 나뉘어 있었어. 김창근 의원 알지? 3학년이었지 싶은데, 5학년인 좌익 선배에게 대들었지. 세력이 약한 우익의 대표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리고 두 세력 간에 돌싸움이 벌어졌지. 교장이 전 직원을 불러서 뒤처리에 관해 물었지만, 아무도 입을 떼지 못 했어, 교사들도 좌우익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지. 그때 김창근이 퇴학을 당했지.”

선생님과의 마지막 여행은 구성산성이었다. 해가 갈수록 목소리는 더 카랑카랑해지시는데, 귀는 점점 어두워지시는 것 같았다. 그날은 유달리 추운 날이었다. 하지만 구성공원 이곳저곳을 살피며 말씀하시는 것이 젊은이들보다 정정하셨다. 『영주중학교 60년사』를 편집하며 선생님 댁에 자료를 찾으러 들른 적이 있었다.

벽장에서 꺼내온 오래된 신문 스크랩을 보시다가 “이것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네.” 하면서 자신을 탓하셨다. 그리고 사진첩을 뒤적거리면서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주인공이셔야 할 선생님은 사진 속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다. 여럿이 찍은 사진 어디에도 선생님은 중앙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빙긋 미소를 짓고 계셨다.

탁본은 선생의 삶의 일부였다
탁본은 선생의 삶의 일부였다

 

글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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