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사서 ‘아미타불상’ 업고 내려와 흑석사 중창한 ‘상호스님’

하늘에서 본 흑석사
하늘에서 본 흑석사

함북 출생-어릴 적 사서삼경-중국 소련 유학-김구와 독립운동
30세 입산-금강 묘향 오대 지리산 거쳐 소백산 초암사 주지
1949년 소백산 소개령 때 초암사 떠나 흑석사 중건 불상 봉안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주 사람들이 가볼 만한 곳으로 흑석사와 귀내 보트장을 꼽았다.

당시 흑석사 가는 길은 이산면사무소를 지나 조그네재를 넘는다. 우측 산중턱 검둥바우를 쳐다보면서 산비탈로 난 오르막길을 올라 산등성이를 넘으면 흑석사가 나왔다.

산 아래는 밭이 있고 구릉 아늑한 곳에 작은 절집이 있었다. 법당에는 그리 크지 않은 부처가 모셔져 있고, 산비탈 두어 곳에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절집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절간에 딸린 공부방이 있었는데 이 공부방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유일한 숙박 시설이기도 했다.

지금의 흑석사는 새로운 길이 나고 일주문도 세워졌고 단청 고운 절집도 여러 채 건립됐다.

요즘 부석사에 관광버스가 10대쯤 오면 흑석사는 3대쯤 온다고 한다. 가끔 책을 들고 찾아오는 학생, 신문을 들고 뭔가를 찾아 적는 사람들 등 절을 찾는 탐방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게 절집 사람의 말이다. 아마도 국보 ‘아미타불좌상’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보인다.

오늘의 흑석사를 있게 한 사람은 해방 후 초암사 주지로 있다가 6.25 직전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등에 업고 이곳으로 내려와 흑석사를 중창(重創)한 초암당(草庵堂) 상호(祥鎬, 1895〜1986)스님이다.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
국보 제282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

영주 흑석사

영주 흑석사(黑石寺)는 역사 오랜 고찰(古刹)이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에 지은 사찰 중 하나라고 전하지만 창건 이후 고려말-조선 초까지 사찰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현재 흑석사에는 신라의 마애삼존불과 석불좌상, 석탑 등이 남아있어 역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명찰(名刹)이라고 사학자들은 말한다.

흑석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군에서 남으로 15리 지점에 있다(在郡南十五里)”라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 전기까지는 존속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범우고(梵宇攷, 1799)에서는 “현재는 폐사 되었다(今廢)”라 한 것을 보면 1800년 이전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681호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보물681호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

폐사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 또는 1700년대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들 한다.

흑석사 중창 시기는 6.25사변 무렵으로 보고 있다. 해방 후 1948년 가을 소백산 일대는 빨갱이들의 만행으로 주민피해가 심각했다. 군 당국은 산간 주민 및 사찰 보호를 위해 소개령을 발령했다. 이때 초암사 주지 상호 스님도 절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초암사 목재를 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흑석사(黑石寺)를 중창하게 됐다.

소백산 초암사는 이웃한 성혈사, 비로사와 함께 귀한 문화재들을 소장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초암사에 전해져 왔는데 일제강점기 때 영주경찰서장의 소개로 총독부 박물관으로 들어갔고, 현 국보 흑석사 아미타불좌상도 초암사에서 흑석사로 이안(移安)하게 되었다고 상호 스님이 전해주었다.

상호스님 생전 모습
상호스님 생전 모습

1895년 함북 성진 학안 출생

상호(충주김씨) 스님은 1895년 함북 성진 학안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천성이 영리하여 어린 시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였고,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이동하여 신학문을 배웠으며, 소련으로 유학하여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했다.

귀국하여 목회와 교편으로 조국광복을 계책하여 기미독립운동에 간여(干與)하다가 무수한 옥고를 치렀다.

인생무상을 통념하고 1924년 30세에 드디어 단발 입산하니 경북 의성 고운사 김수월(金水月) 화상에게 득도 수계(受戒)하였다.

다음에 나오는 불교 용어들은 설명하기 어려워 원문 그대로를 올린다.

내흥일대시교(內典一代時敎)를 섭렵한 다음 심사(尋師) 방도(訪道)하여 두타행을 떠날새 금강(金剛) 묘향(妙香)을 두루하고 오대산 방한암선사회 하에 안거하며 깊은 심요(心要)를 얻었다.

지리산 화과원에 백용성 화상을 친견하니 여시아수(如是阿誰)오 하시거늘 불시심불(不是心佛)이요 비물비선(非勿比禪)이니라 하고 정시 운(云)하되 구래풍진객(久來風塵客)이 금조홀회수(今朝忽回首)하니, 강산천만리에 일조명월백(一條明月白)이니라 하니 선재(善哉)라 하시고 백운청산하에 초암무동하(草庵無冬夏)로다. 기구어초화(畿句漁樵話)와 일침호노가(一枕楛盧架)니라 하다.

이로부터 초암당(草庵堂)이라 호(號)하고 천하총림에 선기를 높였으니 효봉(曉峰) 묵담(黙談) 경봉(鏡峰) 등 제 대선사로 더불어 거양교유(擧揚交遊)가 깊었다.

1986년 흑석사서 입적(入寂)

1945년 51세에 영주 초암사 주지로 부임 안주하다가 영주포교원으로 흑석사를 중건해 교화도생(敎化度生)에 진력하더니 1953년에는 한글학회 어학위원과 중앙국립도서관장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1954년에는 교단정화불사에 참여해 조계종교무부장, 감찰원장을 역임했다.

사(師) 말년에는 노익(老益) 정근(精勤)하며 엄지(嚴持) 비니(毘尼)하고 육시념송(六時念誦)과 좌선정진(坐禪精進)에 여념이 없더니 1986년 병인 6월 25일에 이연(怡然) 입적(入寂)하니 세수(世壽) 92라 다비(茶毘) 화화(化火)에 오색 사리(舍利) 57과(顆)가 찬연무비(燦然無比)하니 석장봉안(石葬奉安)하며 입비영기(立碑永記)하노라. 불기 2532(1988)년 무진 10월 일

초암당 상호대종사지비
초암당 상호대종사지비

검둥바우가 있어 흑석사

절 이름은 대개가 불교 정신에 맞는 이름이 많은데 ‘흑석사(黑石寺)’라니 이름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사람들은 이곳에 ‘검둥바우’가 있어 ‘검둥골’이라 불렀는데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검둥바우’에서 유래하여 검을 흑(黑)자에 돌 석(石)자를 써 흑석(黑石)이라 칭했다 한다. 최초의 영주지에도 영천군 말암리(末巖里) 흑석방(黑石坊)으로 나온다.

또 이 고장 출신 조선시대 학자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의 문집에 보면 선조 7년(1574) 흑석사에 머물며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고, 영주 출신의 문인 김시빈(金始鑌, 1684∼1729)의 「백남선생문집(白南先生文集)」에 나오는 ‘흑석사에서의 겨울비(黑石寺冬雨)’라는 시도 있다.

흑석마을 어르신이 “흑석에는 검둥바우가 여럿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길가에 있어 눈에 잘 띄는 검둥바우가 마을 앞에 있다. 모양이 베틀의 북을 닮아 ‘북바우’라 부르기도 하고, 거북이 모양과 같다고 해 ‘거북바우’라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주 옛날(통일신라) 절을 처음 지을 당시 이름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 때 문집 속에 ‘흑석사’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곳 지명에 따라 흑석사(黑石寺)라 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소개령으로 초암사를 떠나다

흑석사 뒤꼍에 상호스님 비(碑)가 있지만 초암사를 떠나 흑석사를 중창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앞글에서 “흑석사 국보 아미타불좌상이 ‘초암사에서 흑석사로 이안(移安)하게 되었다’고 상호스님이 전해 주었다”고 했다.

상호스님은 1945년 초암사 주지로 부임했다. 1948년 가을부터 소백산 일대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 심해지자 군 당국은 1949년 가을 소개령을 발령했다. 이때 소백산 일대 희방사, 초암사, 영전사 등 작은 절들은 소개령에 따라 영주 시내, 풍기면 소재지 지역으로 소개하게 됐다.

상호스님은 아미타불상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초암사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흑석사 옛터에 암자를 짓다

상호스님은 1949년 가을에서 1950년 봄 사이 어느 날 불상을 등에 업고 영주 시내로 향했다. 이때 상호스님은 아미타불 복장에 유물이 들어있는 줄 모르는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입적할 때까지도 복장유물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교통편도 없을 때라 걸어서 다니는 게 일쑤였다. 스님은 불상을 등에 지고 순흥-동촌-장수고개를 지나 영주 시내로 들어왔다. 다급히 절을 떠난 상호스님은 의지할 곳이 없어 처음에는 영주역 앞 어느 여인숙에 들어가 불상을 모셨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이웃 사람들은 “이산에 가면 옛 절터가 있으니 가보라”고 권한다.

스님은 이산면으로 가서 물어물어 흑석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절을 지을 계책도 세웠다. 당시는 도움을 청할 곳도 도와줄 사람도 드물었다. 오직 불심으로 초암사 목재를 실어 나를 준비를 하던 중 영주 보름골에 사는 우계이씨가의 한 불자의 도움으로 수레를 빌려 목재를 실어 날랐고, 작은 암자형 절집을 지어 아미타불좌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흑석사는 상호스님의 불력(佛力)에 의해 중창됐다.

다음 호에는 600년 왕실 원불, 흑석사의 국보 「목조아미타불좌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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