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재(養眞齋), 와화(瓦花)의 운치가 고색창연했다

양진재 정침
양진재 정침

백암이 국풍 성지를 대동하고 태백준령을 친히 답사하여 얻은 터
해방 후 백암의 14대손 김준영이 양진재 중건 계획에 종중 대호응
1602년 명나라 신종 황제가 준 용연(龍硯), 다양한 문양 보물급

천운정과 양진재 사이 백암 선생 시비가 있다. 이 시는 선생이 임인년(선조35, 1602) 겨울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고향집 양진재(養眞齋)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이다. 양진재는 백암 선생이 조용히 거처(居處)하던 집이다.

기자는 지난 10월 6일 양진재 사랑채에서 김태곤(金兌坤, 백암의 16대손) 주손을 만나 양진재 중수(重修) 내력과 소장 유물에 대해 들었다.

양진재 사랑채
양진재 사랑채

이름난 풍수가 터 잡은 명당

백암 선생은 당시 이름난 풍수 성지(性智, 國風)를 대동하고 태백준령을 친히 답사하다가 동포(東浦, 현 石浦)에 이르러 ‘자손에게 남겨줄 땅’으로 결정하니, 이곳은 태백산의 정기를 받은 땅으로 문수산을 조산으로 업고 앉아 남쪽으로 학가산을 바라보며, 내성천이 좌우에서 흐르다가 합수하는 곳이다. 또한 언덕 사이에는 문필봉이 솟아있고 마을 양옆 봉우리는 와우형으로 후덕함을 지니고 있어 대대로 영화로움을 지닌 지세이다.

여기에 작은 정자를 짓고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半畝方塘一鑑開(반묘방당일감개)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떠 있네.

구절에서 정자의 이름을 천운정이라 하고 동포서당(東浦書堂)을 같이 설립하여 후학(後學)을 가르치니 한석봉(韓石峰)과 김선원(金仙源)이 보내온 경축 현판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양진재 행랑채
양진재 행랑채

양진재(養眞齋)를 짓다

백암 선생은 이곳에 머무를 집을 축조하고 ‘양진재’라 하니, 집의 구조는 ‘曰’자 형으로 사대문과 사소문의 팔문진법이 숨어있고, 가묘와 십이 간 행랑과 식솔의 거처를 좌우로 배치하니 칠십여 간의 규모였다. 대문(大門) 밖에는 돌다리를 놓아 와파교(臥波橋)라 이름 붙이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반묘당(半畝塘)이라 하고, 연꽃 향기와 흐르는 물소리의 조화로움을 아끼듯 감상했다. 그리고 우물은 활수천이라 이름 붙이시니 정화수의 으뜸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 조야(朝野)의 제현(諸賢)들이 왕래하여 축하의 시구를 남기니 경향 각지의 빼어난 문장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남아있다.

백암 선생이 노년을 맞아 영주의 구대(龜臺, 현 서구대)와 천전의 성암(星巖)과 이곳 동포(東浦) 사이를 마음 가는 대로 유유(悠悠)히 생활하다 세상을 떠나니 천운정과 양진재는 둘째 아들 지선(止善, 의금부도사)에게 세전(世傳)하였다.

백암 선생 천운정 시절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1598년 류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선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이런 점을 시기하는 이이첨의 무리들이 명나라 ‘정응태 사건’을 일으켜 류성룡을 모해 하자 백암이 상소하여 적극 변명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백암의 본가는 본래 구학정(龜鶴亭, 현 대순진리 자리)이었으나 주위가 번잡하다 하여 읍치의 동쪽 이십리 쯤 되는 동포에 정자를 짓고 천운정(天雲亭)이라 불렀다. 아마도 천운정과 양진재가 지어진 시기도 이 무렵이 아닐까 추정된다.

천운정이 자리 잡은 동포(東浦) 지역은 ‘동포16경’이라 불리며 빼어난 산수로 이름났었다. 정자는 천운정, 서당은 동포서당(東浦書堂), 집은 양진재(養眞齋), 연못은 반무당(半畝塘), 샘물은 활수천(活水泉)이라 명명하고 조용히 산수를 즐기곤 하였다. 백암 선생이 동포 16경의 시를 지으니 류성룡, 정탁, 구사맹, 이수광 등 수 많은 제현들이 이에 화답하여 시를 남겼다.

300년 버틴 양진재

1598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진재는 300여 년의 풍우(風雨) 앞에 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地境)에 이르게 됐다.

이에 8.15해방 무렵 백암의 14대손 김준영(金俊榮)이 양진재(養眞齊)의 중건(重建)을 획책(劃策)하니 종중의 여러 원로들과 문중의 청장년이 적극 호응했다.

중론의 관심하에 우선 습(濕)한 지대를 높이기 위해 제방을 절개하고 소철로(小鐵路)를 부설해 인력으로 지반수장을 높이니 당시의 형세로는 가위 장관이었다.

당시 족친 김창룡께서 봉화 소천 구마동의 양재(良才) 춘양목(春陽木)을 조달(調達)하고, 목수(木手) 이윤경(李潤京) 옹의 탁월한 재능과 지하의 여러 종중들의 합심 노력으로 역사(役事)는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고색창연한 양진재

그러던 중 6.25사변이 발발해 양진재의 완공이 우려되었으나 조상의 음덕(蔭德)과 향중(鄕中) 인심의 동조로 아무런 탈없이 역사는 계속됐다.

그렇지만 난중(亂中)의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다소 축소된 규모였으나 그래도 전체 규모는 사십여 간에 이르렀다.

예부터 전해오는 건축기법을 유지하되 새로운 격식을 첨가하니 정침(正寢)과 대청(大廳)은 백여 명이 연이어 앉을 수 있고 양진재의 누상(樓床)은 동포 앞의 대평들(大坪들)을 조망(眺望)할 수 있는 장쾌(壯快)함을 가지고 있었다.

집을 얽은 짜임새의 정교(精巧)함은 빈틈이 없고 나무 무늬의 수려(秀麗)함은 화폭(畵幅)같이 아름답다. 기와(蓋瓦)는 옛 자재를 다시 사용하여 300여 년 내려온 와화(瓦花)의 운치(韻致)와 그 품위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함을 나타내고 있다.

천운정 소장 보물

기자는 천운정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천운정에는 어떤 보물이 숨어있을까?’였다. 김태곤 주손께 “소장 보물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모두 소수박물관에 기탁했다”면서 ‘기탁자료목록’만 보여주었다.

목록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3권, 서전(書傳) 3권, 서해(書解) 5권, 팔대가(八大家) 22권, 기문록(記聞錄) 4권, 강목(綱目) 12권, 문원(文苑) 3권, 자치통감절요속편(資治通鑑節要續篇) 1권,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 1권, 근사록(近思錄) 3권, 용연(龍硯) 1점, 호연(虎硯) 1점, 일월연(日月硯) 1점 등 모두 60점이다.

김태곤 주손은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받은 벼루(龍硯)는 역사적으로 보나 작품성(다양한 문양)으로 보나 보물급”이라고 했다.

용연(龍硯)
용연(龍硯)

명나라 신종황제가 준 선물

백암 김륵은 1602년(선조35) 63세 8월에 동지상사의 명이 내려져 명나라로 가게 됐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의 재침이 우려돼 명나라에 다시 출병을 요청했지만 명나라에서는 다시 출병이 어려운 재역불가(再役不可)의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백암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소대형(蕭大亨)을 만나 조목조목 명쾌한 화술로 설득하니 소대형은 “일본이 다시 넘볼 수 없도록 조치하겠다”는 약속했고, 황제는 “백암의 충심이 훌륭하다”며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약속의 칙지(勅旨)를 특별히 내려 조선을 안심하게 했다.

사신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황제에게 하직을 청하니 황제는 옥새가 찍힌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벼루 4점(龍硯, 虎硯, 日月硯, 梅竹硯)을 선사했다. 보물급 대학연의는 본가 구학정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1960년대 어느 날 도난 당해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천운정이 소정하고 있던 벼루 4점 중 1점은 백암이 과거에 급제한 외손에게 선물로 주었고, 3점(龍硯, 虎硯, 日月硯)은 천운정에 소장하고 있다가 지금은 소수박물관에 위탁관리하고 있다.

호연(虎硯)
호연(虎硯)

보물급 벼루 용연(龍硯)

천운정 소장 벼루 3점 중 용연(龍硯)은 크기와 문양이 특별해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돋보이지만, 아직 문화재로 등재하지 못하고 있다.

용연은 22.5×33.5×2.8cm로 신문을 반으로 접은 크기로 비교적 큰 편이다. 이 벼루는 1602년 백암이 명나라 신종황제로부터 받은 벼루로 명나라 황실이 ‘특별히 제작한 벼루’라 전한다.

둥근 연(硯)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 사면에는 용(龍), 선인(仙人)과 동자(童子), 포도(葡萄), 포도 따는 원숭이(猿), 학(鶴), 기와집, 꽃, 매화, 나뭇잎, 사슴뿔 등 다양한 문양이 빽빽하게 조각되어 있다.

용연(龍硯)이란 용의 문양이 새겨진 벼루를 말한다. 또 호연은 호랑이 문양, 일월연은 해와 달이 새겨진 문양, 매죽연은 매화와 대나무가 새겨진 벼루를 말한다. 김태곤 주손은 “기탁 당시 문화재 등록을 추진한다고 하였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일월연(日月硯)
일월연(日月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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